1.
바다를 보러 다녀왔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양양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는데, 양양에 도착해서는 바로 차를 빌려 떠났다. 양양의 바다들을 몇 둘러보긴 했지만, 몇 년 전 내 기억 속의 고요하고 적막한 바다가 더는 아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차를 몰았다. 서퍼들을 보았고, 캠퍼들을 보았다. 차박러들을 보았고, 배낭 여행객들을 보았다. 그러다 서서히 해가 졌고, 남애항 앞의 숙소에서 첫 날을 보내기로 했다. 코로나 시기였기도 하거니와 한창 성수기가 이제 막 지났기 때문인지 저녁 여덟 시 무렵 근처 식당에서 주린 배를 채우려는 내 계획은 무산이 됐다. 다행인 건, 숙소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이 횟집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문은 닫았지만 밥 먹을 데 없냐 하니 지금이 마침 전어 철이라며, '전어에 쇠주 한 잔'하실 거냐고 물으셨다. 그렇게 여행 와서 술을 먹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첫 날부터 깨지고 말았다.
술에 조금 취해 잠에 들었다 뱃고동 소리에 깼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출처를 알 수 없는 헤드라이트들이 숙소 밖 어둠을 훑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잠긴 검은 바다를 스크린 삼아 저 너머 어딘가에서는 초록-빨강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멈추라는 건지, 가도 좋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초록-빨강 신호등 이편에서 어부들이 분주하게 새벽을 살아가고 있었다.
2.
둘째 날 부터는 비가 왔다. 하루 종일말이다. 떠나오는 첫 날에야 일기 예보를 확인했는데, 일주일 가량 가을 장마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솔직히 푸른 바다를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고, 날씨가 너무 좋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동안에도 바다는 충분히 넓고 깊었다.
3.
모든 욕구를 다 채울 수 있을 거 같은 서울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 바로,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말이면 그 긴 차량 행렬을 뚫고 굳이 바다를 보러 서해로, 동해로 떠나가나 보다. 바다가 주는 쉼이 없이는 안 될 거 같아서 일까. 꽉 막힌 서울에는 밤늦도록 어디에나 화려한 스토리텔링이 가득하지만, 그것들을 비워 낼, 막과 막 사이의 쉼표와 마침표가 마땅치 않다. 그런 점에서 한강이 큰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바다만큼의 여백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4.
셋째 날에도 비가 왔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퍼스트 리폼드>라는 영화를 봤다.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부인과 헤어진 채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사로 살아가는 한 남자가 주인공이었다. 중간 중간 깜빡 잠에들만큼 관념적인 대화들이 오가는 영화였지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인상적이었다. 결국,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그에게 구원은 성도 메리였다.
5.
마지막 날. 바다가 보이는 강릉과 양양 사이 고요한 숙소에서 눈을 떴다. 언제그랬냐는 듯 맑은 해가 떴고, 잠잠해진 바다는 아침 햇살을 아름답게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 해변을 걸으며 바다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3박 4일의 여행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고는 바다를 찾아 달려가고, 바다 앞에 멈춰섰다가, 다시 바다를 향해 달려갔던 것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었고, 또다시 바다가 그리워질 마음가짐을 얻게 되었다. 뭐든지 새로 시작하면 됐다. 저 멀리서 끝없이 밀려오고, 또 부서지기를 반복했던 양양과 강릉 사이의 바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