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벌써 첫만남이라면 20년전. 그간 살아온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친구는 곧 주재원으로 출국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CCM 앨범을 듣는다. 친구가 아내와 함께 출시했다는 이지워십의 ‹주님하고 부르기만 해도›다.
노래는 '주님...'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크리스천이라도 저마다 '주님'이라는 존재로부터 떠오르는 이미지가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버지'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창조주' 또 누군가에게는 아직은 멀리 있는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이라는 존재는 종종 크리스천들에 의해 왜곡되곤 한다. 우리의 한계로는 규정할 수 없는 존재는, 너무도 간편하게 좁은 인식과 감각의 테두리 속에 갇히곤 한다.
'주님'이라는 존재는 각자에 의해 무언가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으로서 겸손히 물어야 할 것은 '주님의 존재론적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나의 존재에 부여한 의미'가 아닐까?
존재의 의미를 헤아려보는 일은 보통 고통 속에서 시작된다. 살다보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버거운 삶의 순간들 앞에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군가는 고백을 시도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그분의' 인도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을. 온갖 시련 속에서도 그것이 결국 하나의 큰 '뜻하심'안에 있다는 것을. 그것을 신뢰한다는 것을(또는 신뢰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을).
이것은 얼마나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자 선택인가. 그러나 바로 이러한 순수하면서도 무구한 모험의 태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 숱한 시도야 말로, 바로 선진들 믿음의 초석과 같은 것이리라.
때론, 빠르게 지나갔으면 하는 고통의 시간들도 기어코 언제가는 다 지나간다. 애써 붙잡으려해도 붙잡을 수 없는 '찰나의 바람'처럼. 물론,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설 수 있는 순간들도 언젠가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날'을 고대하며, 또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그 날'이 곧 '오늘'에서 열매를 맺으며, '오늘'이 곧 '그 날'에 속해있음을 믿는 마음으로 말이다.
후렴 부분에는 친구의 목소리도 듀엣으로 잠깐 나온다. 무엇보다도 한 가정 안에서 이렇게 마음을 모아 함께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귀하다. 앞으로도 더 좋은 앨범들을 많이 내주기를. 부디, 더 아름다운 미래가 이 가정에 있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