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지구 밖 한 마을이 있다. 유토피아라 불릴만한 이상적인 공간에는 차별과 배제가 없다. 이곳 사람들은 생에 한 번 '지구'로 순례를 떠난다.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무엇보다도 다툼과 분쟁이 발생하는 지구로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러한 지구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안정과 평화를 버리고, 혼란과 고통을 택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개조의 욕망
소설의 화자 데이지가 사는 마을은 한 바이오해커 릴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얼굴에 있는 흉터 때문에 따가운 시선을 경험하며 자랐던 그녀는 '흠이 없고 완벽한, 개조 인간'을 만드는 해커로 활동했다. 이로써 릴리는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았다. 그렇게 세상에는 '신인류'로 가득한 새로운 구획이 형성되었고, '개조되지 못한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릴리는 실수로 자신처럼 얼굴에 흉터가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릴리는 고민 끝에 존재를 폐기시키지 않았고, 돌연 바이오해커 활동을 그만두고 종적을 감춘다.
릴리가 나의 ‘결함’을 눈치챈 것은 발생 초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자인이 예정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는 전체 프로세스에 항상 포함되는 과정이었다. 실수는 늘 일정 비율로 일어났고 그것을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 릴리는 내가 그녀와 똑같은 유전병을 가진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즉시 폐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릴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릴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나의 결함을 발견한 순간 이후에 남아 있는 릴리의 기록은 제대로 해독하기가 어렵다.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은 단 한 줄이었다. 릴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임을 증명하는가?’ -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
그렇게 릴리는 지금의 데이지가 사는 새로운 마을을 만든다. 완벽과는 거리가 먼, 존재의 부족과 결핍이 온전한 개성으로 인식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마을을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독특한 얼룩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
이곳 마을 사람들이 생에 한 번 지구로 순례를 떠나는 일보다 더욱 특이한 건 순례 이후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임에도, 그렇게 머물 이유가 없어 보임에도 일부 순례자들은 기어코 지구에 머물기를 택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
우리는 왜 이곳에서 살아가는가
김초엽의 소설은, 기술 발달의 시대적 트렌드 속에서 흔히 망각되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질문을 일깨운다. 이는 단지 기술의 윤리성을 지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기술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단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오래된 명제의 먼지를 걷어내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그리는 개조의 욕망이 실현된 사회는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진부한 것들이 실제로는 여러 토대의 핵심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지구 밖 순례자들이 전해 온 이야기를 되짚어 보는 일은 일말의 진실을 발견해내는 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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