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우주 정거장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170세 노인 '안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녀는 우주선을 둘러싼 공간을 왜곡하는 워프 버블을 개발했던 연구자였다. 워프 버블을 이용한 항법은 빛보다 빠르게 다른 은하에 도달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연구는 성공적이었고, 많은 이들이 이를 통해 전에는 갈 수 없었던 새로운 행성계로 이주해갔다. 거기엔 안나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나는 연구를 마치고 가족과 합류하려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기술인 웜홀 항법이 도입된 터였다.
문제는 웜홀 항법을 통해서는 가족들이 옮겨간 슬렌포니아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웜홀 항법은 워프 항법과는 다르게 우주에서 정해진 통로를 통해 공간을 이동하는 방법이었는데, 슬렌포니아로 가는 웜홀은 없었기 때문이다. 비용과 효율의 효용을 따를 수 밖에 없는 항공 업체들은 워프 항법을 중단했고, 웜홀 항법을 채택했다. 안나는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며 쓸쓸히 정거장을 지키게 된다.
'나'는 그런 안나를 설득하기 위해 정거장에 간다. 이미 수 없이 해동과 냉동을 반복하며 버텨온 안나를 달래 이제 그만 포기하고 어디로든 돌아가게 하라는 회사의 명령을 받고서다. 하지만 안나의 생각은 확고했고, 나는 그런 안나를 설득하는 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안나 씨.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말했잖은가. 기다리고 있는 걸세.” 안나의 시선이 창밖의 우주를 향했다. “언젠가는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우주선이 출항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슬렌포니아 근처의 웜홀 통로가 열리지 않을까…….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 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이하 모든 인용구 동일 출처)
실랑이 끝에 안나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오래된 자신의 우주선에 뛰어오른다. 그리고서 우주선, 아니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우주선도 못되는 셔틀을 타고 슬렌포니아로 항해를 시작한다.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뿐이었고, 그마저도 어딘가에 부딪히기달도 하면 산산조각이 날 거 같은 상황이었다.
남자는 커다란 위성들 사이에서 초라한 안나의 셔틀이 파편들을 피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금세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은 작은 몸집이었다.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외에는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마침내 안나가 정거장을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끝난다. 김초엽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 속 마지막 한 문장을 인용해 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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