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함 적응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 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페니키스 섬에서 젊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꽃을 당긴 목적의식만도, 경력과 대의와 아내와 편안한 생활에 대한 보장만도 아니었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 그것은 바다와 별들과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2.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자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 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3.
아직도 헷갈리는가? 그러면 달리 설명해보자. 수천년 동안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이 산꼭대기에서 사는 모든 생물을 진화적으로 동일한 ‘산어류’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상상해보자. 산에 사는 어류. 그러니까 산어류에는 산염소와 산두꺼비, 산독수리 그리고 건강하게 수염을 기르고 위스키를 즐기는 산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제는 이 모든 생물이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우연히도 그 고도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비슷한 외피를 갖도록 진화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외피가 비늘이 아니라 격자무늬라고 해보자. 모두가 격자무늬를 갖고 있다. 격자무늬 독수리, 격자무늬 두꺼비, 격자무늬 사람. 이렇게 서식지(산꼭대기)와 피부 유형(격자무늬)이 같다 보니 이들은 동일한 종류의 생물처럼 보인다. 모두 산어류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한 종류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어류에 대해 해온 일이 바로 이와 똑같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이다.
실상 물속을 들여다보면, 비늘로 된 의상 밑에 산꼭대기 산어류들만큼이나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숨어있다. 이를테면 육기어류 페어와 실러캔스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있고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진화의 분계선 너머에 조기어류가 있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연골어강이라 불리는 상어와 가오리들도 있는데, 이들은 참 수수께끼 같은 집단이다. 그 매끈한 피부와 곡선을 띤 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포유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비늘이 있는 송어와 장어보다 우리와 훨씬 더 거리가 멀고, 진화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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