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또는 격세유전으로 내려온 어떤 뿌리 깊은 본능이 이 방랑자를 자꾸 충동질하여 그네의 조상이 역사의 저 희미한 여명기에 떠났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롭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는 폴 고갱의 삶을 다룬 책이다. 폴 고갱은 책에서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데 그는 런던의 괜찮은 증권 브로커로 살다가 돌연 그림을 그리겠다며 모든 걸 버리고(가족 포함) 파리로 간다.
파리에서 뒷골목 생활을 전전하던 스트릭랜드는 태평양의 외딴 섬 타히티로 건너 가 그림을 그리다 문둥병에 걸려 장님이 된 채 생을 마감한다.
한편 고갱은 스트릭랜드처럼 가족을 버리고 떠나진 않았다만, 실제로 증권 브로커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35세가 되던 해에 증권 시장이 붕괴되며 전업 화가가 되기로 한다.
그렇게 생활이 어려워지자 (소설과는 반대로) 고갱의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떠난다. 이후로도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던 고갱은 공사장 인부로 일하기도 하다가 43세에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에서는 13살의 몸을 파는 아이와 동거를 하며 자식을 낳았지만 병으로 죽는다. 고갱은 심장병을 비롯한 성병에 걸리는데,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고갱은 1903년 55살에 심장 마비로 사망한다.
아타가 밥을 짓고 있는 동안 우리는 개울에 가서 미역을 감았죠.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베란다에 나와 앉아 담배도 피고 잡담도 했어요. 젊은 친구가 마침 아코디언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가지고 나와 십 년도 더 전에 연예관에서 유행했던 음악을 연주하는데, 문명과는 수만 리가 떨어진 열대의 밤에 듣노라니 기분이 참 야릇하더군요. 내가 스트릭랜드에게 물었죠. 그처럼 되는 대로 사는 게 싫증이 나지 않느냐고 말예요. 그랬더니 전혀 그렇지 않대요. 가까이에 모델들이 있어서 오히려 좋다나요. 얼마 있으니 토박이들은 잔뜩 하품을 하면서 자러 들어가버리고 스트릭랜드와 나만 남았죠. 그때 그 밤의 죽은 듯한 적막을 나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포토무에 있는 내 섬에서는 빔이 되어도 그처럼 완벽하게 고요하지는 않아요. 바닷가에서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바스락거리고, 오만가지 조그만 조개들이 한없이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참게는 더 소란스럽게 기어다니고요. 이따금 초호에서 물고기들이 뛰어오르는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때로 상어가 나타날 때면 물고기들이 죽어라 달아나느라고 요란하게 물튀기는 소리를 내기도 해요. 그 뿐인가요. 무엇보다 한없이 바위에 부딪히는 둔중한 파도 소리가 있지요. 그런데 스트릭랜드가 사는 그곳에는 소리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밤에 피는 하얀 꽃들로 사방은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밤이었는지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영혼이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두둥실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죽음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사랑스러운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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