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실용서라 하는 책들을 많이 읽고 있는 요즘,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를 읽는 경험은 과연 쓸모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안타깝게도 문학은 많은 것들을 외면한다. 문학은 한 개인의 주관성을 사회적 보편성으로 확장해 시대에 정치적 목소리를 형성해내지만(최소한 이를 인식하는 독자에게는), 많은 목소리가 그러하듯 그것은 발설되는 순간 응집되지 못하면 금세 흩어지고 많은 하나의 메시지일 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목소리를 계속해서 읽고 또 기억하려 하는 것은 흩어졌다고 해서 그 목소리가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결코 밥벌이와 사랑하며 살아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당장에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 그러니까 나 또는 누군가를 위한 인생의 선택을 해야 할 때, 불현듯 되살아나 우리와 마주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인터뷰를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일종의 구원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타자를 지나 세계를 향하는 -세계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적어도 동시대에 비슷한 정치적 맥락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가는- 시도인 거 같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많은 것들을 구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기록하여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엮인 사회적,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조명함으로써 문학의 쓸모를 구현에 내려는 거 같았다. 그것이 그녀가 생각한 문학의 가장 효용적인 쓸모였을까.
쓸모라. 나는 모든 것이 결국에 쓸모가 있기 마련이라는 조금 빤한 말에 동의한다. 내가 읽어 내려가는 실용서들도 당장 지금의 삶을 조금 더 효율적이고 윤택하게 살아가는데 적잖은 도움을 준다. 다만 문학처럼 시간이 지나 때로는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되어서야 쓸모를 갖게 되는 것들도 있다. 그녀가 강물에서 돌을 건져낸다고 묘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종종 강기슭에 다다랐을 때,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 깊이 동 떨어져 있던 그 돌을 응시하며 집어내려 할 때, 문득 그녀와 같은 작가가 써 내려간 작품들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할 거 같다.
’진정한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오늘날의 시대적 정언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깊이 침잠하여도 그것은 결국 내 마음에서만 완벽한 하나의 세계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나를 위한 글쓰기가 아닌 누군가를 향하는 글쓰기는 나의 세계를 돌아보고 또 그것을 만들어낸 타인의 세계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이 빚어진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구조적 맥락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거 같다. 조금 거친 포섭 같지만, 그녀가 말하는 글쓰기의 쓸모 또한 바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쓰기는 결국 나에게서 출발하지만 마침표는 결국 시작점에서부터 벗어난 어딘가에 찍힌다. 작가의 역할과 역량은 그러한 마침표를 어디에 찍어내는 가에 달려있지 않을까.
문학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마침표와 가까운 어느 곳에 독자로서 자신의 점을 하나 찍어두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나의 문학을 읽고 난 전과 후로 독자의 삶의 중심은 묘하게 흐트러진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난점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구심점이 될 수도 있는 점들이 문학을 통해 찍힌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를 구성하는 내면의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모아야 해 요. 저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받은 적이 없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없죠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빠른 변화 때문에 사라지게 될 것들, 그 얼굴들, 그 순간들을 기 록하는 성향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사실상 무엇인가에 대해 쓰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요 물론 우리는 받아들이거나 그저 세상을 즐길 수도 있죠. 그것은 탐미주의적인 입장이에요. 우리의 작은 행복, 세상에 우 리의 작은 굴을 만드는 것, 그것도 환영할 일이죠 당연히 그렇게 아주 잘 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하고요. 그보다는 스스로에게 물었으면 해요 절대로 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극단적인 단절에 대한 생각은 끝내야 한다는 것을 잘 인지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를.
(...)
저는 저의 글쓰기 방식이 자전적 소설에 동일시되는 것을 항상 거부해 왔어요. 자전적 소설이라는 표현 자체에도 자기 자신 안에 갇히는,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무엇인가가 있으니까요. 저는 책이 개인적인 것이 되기를 절대 원한 적이 없었죠. 어떤 일들이 저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쓴 게 아니에요. 그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러니까 저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닌 거죠. 「부끄러움」 과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에서 제가 포착 하고 싶었던 것은 경험의 특수성이 아닌, 그것의 형언할 수 없는 보편성이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글이 되면, 그것은 정치적이죠
(...)
체험들이 당신의 것에서만 머무는 방식으로 글을 써서는 안 돼요. 개인적인 것들을 넘어서야 하죠. 그래요. 그것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다르게 살게 하며, 또한 행복하게 해주죠. 문학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저는 제 책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몰라요. 그러나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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