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와달라고 부탁해요. 여우의 방문이 리추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리추얼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시간 안에서 리추얼은 공간 안에서 집에 해당합니다. 리추얼은 시간을 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요.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시간을 정돈하죠. 그렇게 리추얼은 시간을 유의미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요."
리추얼의 종말
오늘날에는 의미있는 리추얼들이 빠르게 모습을 감추고 있다. 리추얼(의례)은 공동체적 형식의 반복을 의미한다. 리추얼의 사회는 상징적인 행위와 형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형식과 반복이라니? 한병철은 '새로운 삶의 꼴'을 찾아내는 과정을 리추얼을 통해 '공동체적 형식을 반복하는 것'과 연결 짓는다. 무슨 말일까? 형식과 반복은 한물간 가치가 아니던가가? 자유로움과 주체성 그리고 이에 바탕이 되는 진정성이 중요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러나 "형식적 반복은 매력 없는 것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에서, 실낱에서 집약성을 발견해낸다. 반면에 늘 새로운 것, 흥분을 일으키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이미 있는 것을 간과한다. 뜻, 곧 길은 반복 가능하다. (...) 외적 형식이 내적 변화를 가져 온다. 미사 덕분에 성직자는 사물과 아름답게 교류하는 법을 배운다. 잔과 성체를 부드럽게 쥐는 법, 용기들을 느긋하게 닦는 법, 책장을 넘기는 법, 그리고 사물들과 아름답게 교류한 결과를 배운다."
신자유주의와 번아웃
현대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주체성과 진정성에 대해 숙고했던 때가 또 있었던가? '진짜'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성과 주체성은 무엇을 위함인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두는 나르시시즘적 인식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을 다시 폐기한다.
한병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끊없는 생산과 효율성, 최적화를 위한 자발적인 자기 착취를 지적한다. 모두가 끝없이 성장하고자 한다. 언제, 어디까지? 주체가 좌절하여 쓰러질 때까지. 이것이 바로 번아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는 끝맺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잠정적이고 미완성의 대기 상태에 놓인다. 무엇도 궁극적이거나 최종적이지 않다. 현대인은 자유의지와 열정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다가 결국 붕괴한다.
풍요와 빈곤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이는 사회이지만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더 빈곤해진다. 우리는 더 많은 공간과 시간을 생산하려 노력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상실한다.
정리해보자. 한병철이 비판하는 한쪽에는 정처없음, 노동, 생산, 성과, 진정성, 내면, 고립된 개인, 투명한 데이터, 무미 건조한 계산, 포르노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거주, 지속, 놀이, 연출, 형식, 몸, 공동체, 신화, 사유, 유혹이 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거칠게 말해 한쪽의 인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해서 달려가며, 최적화를 지향하고, 시간을 가속화한다. 자신의 세계가 곧 우주라고 생각하며, 알고리즘을 따라 데이터와 정보를 기계적으로 계산하고, 즉각적인 흥분과 자극을 추구한다. 그 반대편에는 머무름과 맺음 그리고 멈춰섬이 있다.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향기를 체험하고, 역할을 연기하고, 공동체적 규범을 반복하며, 상상과 사유를 통해 신성함과 타자를 경험한다.
"유명한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10년 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의미심장한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그 퍼포먼스는 바라보기 리추얼이었어요. 그녀는 3개월 동안 매일 8시간씩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봤죠. 그것은 아주 감동적인 사건이었어요. 몇몇 사람은 그 예술가의 강렬한 시선에 압도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나는 타인의 바라봄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바라봄은 우리의 나르시시즘적 고립에서 끌어낼 수 있어요."
새롭고 낡은 삶의 꼴
책을 읽다보면 리추얼의 전적인 회복이 답일 것 같기도 하지만, 한병철은 리추얼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지 않는다. 리추얼은 새로운 삶의 꼴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대비적 역할을 한다. 즉, 무언가를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다.
보다 현실적인 대안은 이곳과 저곳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문제에 대한 자각, 그리고 자각을 통해 새롭게 관찰되는 틈을 비집고 응시하는 일. 이는 잠깐에 그치고 말지라도 새로우면서도 낡은 어떠한 삶의 꼴을 위해 필요한 의미있는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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