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가 격리를 하느라 걷지 못하니 문득 떠오른 책인지도 모르겠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책으로 몇 년전에 꽤나 인상깊게 본 책이었다. 에버노트에 저장해 둔 책 속의 문장들을 꺼내보기 전 문득, 이번 여행동안 하루에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살펴봤다. 만보기 앱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디바이스 내 자체 어플들에 내 발걸음들이 수치화되어 있었다. 적게는 하루 6~7천 걸음, 많게는 2~3만 걸음까지 걷곤 했다.
여행의 순간은 짤막하기 그지 없지만, 우리는 그 어느 순간보다 이러한 순간을 길게 기억한다. 그건,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물리적 자극이 더 많아지기 때문은 아닐까.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의 화면 밖의, 굳이 구분하자면 아날로그적 새로운 물리적 자극 말이다. 그건 바다에 들어가는 멋진 영상을 아무리 많이 본다해도, 한 번 바다에 들어가는 느낌을 오롯이 재현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에서 이해해 보면 될 것이다.
여러 활동 중에서도 굳이 '걷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걷기를 좋아해서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걸을 때 만족감을 느끼고, 멈춰서면 때로 불행하다. 본래 생각이 많은 타입이라 걷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걷기가 무슨 특별한 행위인 것은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항상 똑같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조로움의 비밀은 바로 권태에 대한 치료제라는 사실이다. 권태란 사유의 공백에 직면한 육체의 부동성이다. 걷기의 반복은 권태를 소멸시킨다. ... 육체의 단조로운 의무는 사고를 해방시킨다. 걷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정신은 육체의 지속적이고 자동적인 노력으로 사용 가능성을 되찾는다. 바로 그때 사고가 이루어진다. ____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일상적인 외출 중
걷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 각자가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사교계 파티나 정신과 진료실에서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된다는 건, 우리를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의 초상에 충실해야 한다고 속박하는 사회적 의무이기도 하다. ____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자유 중
위대한 스승과 철학자들은 걷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야 스마트폰도 없었고, 지금처럼 제대로 된 교통 서비스나 전동 킥보드 따위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이들보다 '관념적'이고 때로는 '이상적'인 삶을 설파하고 추구하는 이들에게 걷기란 보다 건강한 사고와 이를 위한 몸을 위해 필수적인 행동이었던 거 같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었고, 육체보다는, (그렇다고 영혼이나 정신도 아닌) 그저 관념에 지배당해 살아 간다. 그것은 더 큰 의미에서는 하나의 체제 속의 속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많이 걷자는 이야기다. 단지, 육체적 건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적 건강, 그러니까 보다 균형잡힌 삶을 위해서 말이다. 물론, 지금에야 시국이 워낙 좋지 않아 맘 놓고 산책하기 힘든 날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ㅡ 니체 <즐거운 학문> 중
책상물림이라고 불리는 철학자는 외관과 본질을 대립시키기를 좋아한다. 그는 감각적인 정경의 후광 뒤에서, 가시성의 장막 뒤에서 본질적인 것과 순수한 것을 구분해 내려고 하며, 사유의 투명한 영원성이 이 세계의 빛깔들 훨씬 너머에서 반짝거리도록 하려고 애쓴다. 감각적인 것은 거짓말이고, 외관의 유동적인 분산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견유학파 철학자는 이러한 대립 방식을 깨트린다. 왜냐하면 외관 너머로 어떤 진실을 찾거나 다시 구축하러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재성의 근원 속에서 그 진실을 좇는다. 이 세계의 이미지들 바로 아래서 그것들을 떠받치는 것을 찾아다닌다. 기본 원소를 찾는 것이다. (...) 견유학파 철학자를 달리 만드는 것은, 그 발견이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 발견은 어깨를 움츠린 채 자신의 내적 풍요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철학자의 자세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그 본질에 대한 진리가 얼마나 빈약한가, 그의 가르침과 그가 쓴 책들이 얼마나 피상적인가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 쓰인다. ____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견유주의자의 발걸음 중
산다는 즐거움, 그것은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현존과 세계의 현존이 이루는 조화를 맛보는 즐거움이다. (...) 그냥 걷는 것이다. 평정이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때 느껴지는 큰 즐거움이다. 그냥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____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평안한 상태 중
'기록 > 일상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내면이 공허해지는 이유: 온라인과 오프라인 ⏐ 일상 에세이 ⏐ 14 (0) | 2020.04.05 |
---|---|
여행을 떠나며 ⏐ 일상 에세이 ⏐ 12 (0) | 2020.01.13 |
솔루션을 제시하는 방법들: 철학과 창업 ⏐ 스타트업 아이디어 ⏐ 일상 에세이 ⏐ 11 (0) | 2020.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