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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잭 케루악 <길 위에서>를 읽었다. 이것이 '드디어'인 이유는, '드디어' 3주 만에 1, 2권을 다 읽고 지금 이 글을 쓴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번에 중고 서점에서 <길 위에서>를 사 오기 훨씬 전부터 책의 제목을 좋아하여, 언젠가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길 위에서>를 읽어보고자 했던건, 책 속의 주인공 샐이 말하듯 '길은 곧 삶이니까.'라는 지극히 평범한 문장과 연관이 있기도 하고, 삶이 어느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굳이 따지자면 매 순간의 길이 곧 목적지라는, 평소 생각을 대변하는 적절한 문구였기 때문이다.
불꽃치듯 요동치는 그들의 심장 소리와 열정, 그것을 표현하는 잭 케루악의 때로는 길고도 지루한, 잡담들이 가득찬 아주 긴 문단들이 이 책에 널브러져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순례자와 같은 <길 위에서>를 자못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순례를 살아낸다. 삶이 곧 길이요, 길이 곧 삶이라는 듯, 그들은 현재에 충실하며,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히, 먹고, 자고, 사랑하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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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 망나니 샐과 딘,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의 여행 이야기다. 나는 샐과 딘이 그들을 망나니라 부르는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을 것임에 확신한다. 그들은 정말로 망나니여서, 그들이 무어라 불리는지 좀처럼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이상으로, 남의 차를 훔치고, 물건을 훔치고, 소수자와 여성을 폄하하고 희롱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죄책감이란 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자유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그들의 여행길에 낙이 있다면, 바로, 술과 여자, 마리화나다.)
그들은 강박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여행은 어딘가를 떠나 분명 또 다른 어딘가를 향하지만, 중심은 언제나 길 위의 순간에 있다. 그들은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낡은 차를 구해 달리거나, 훔친 차를 타고 달리거나, 혹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차를 대신 옮겨 주는 조건으로 여행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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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런 삶도 있다.' 정도가 책을 덮고 난 나의 소감이다. 그들의 첫 여행은 낭만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점차 나이가 들며, 그들이 그렇게 늙어갈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늙어간다. (이는 운명이라기보다, 그들의 선택이었다.) 자신들이 별 볼이 없는 길 위의 존재들, 그럼에도 낭만으로 가득찬, 그래서 그들의 초라한 외향과 더욱 대비되는, 변두리의 인간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알아간다.
두 망나니. 샐과 과은 안쓰러운 이들이다. 마음 속에서는 무언가 끊임없이 치솟지만, 그것을 뛰쳐 나가는 것으로 밖에 표현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 이는 그들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끝없이 문을 박차고 자유를 향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매일의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리하여 그들의 현재와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기력이 떨어지고, 열정이 식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돈은 여전히 없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풍부한 삶의 이야기들, 경험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순간들이 있지만, 그 뿐이다. 그것들은 일상이 없는 자리에서는 미소 짓게 하는 추억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 삶의 태도가 한 가지 가르침을 줄 때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일상이 없는 이들이 일상을 시작하려 할 때다. 그들은 여행의 행위를 통해, 길 위에서의 그들 삶의 이야기를, 그렇게 일상의 이야기들을 창조해 간다. 그들은 삶에서 시작하지 말고, 길에서 시작하라 한다. 그러면서 그 하나의 주장을, 하나의 사실로 만들어 낸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이 또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을까? 혹은 자유로운 그들에게는 우스운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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