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개가 키우고 싶었고, 조금 자라서는 고양이가 키우고 싶었지만 실제로 키워본 적은 없다.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고, 그러다 혼자 나와서 살게 되었는데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못한 이유는 며칠이고 집을 비우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찬성도 처음부터 개를 키울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져 있는 거 같은 개에게 얼음 한 조각을 주게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찬성이 데려온 개, 에반은 이미 많이 늙어 있었다.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기력 때문에 동물 병원에 찾았다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가난한 찬성은 치료비를 댈 수 없었고,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안락사'를 택해 보기로 한다.
한 번은 병원이 상중이어서 안락사를 시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더 기다리다 스마트폰에 유심을 꽂고, 터닝메카드를 사고, 핫바를 사먹는 터라 찬성이 힘겹게 모았던, 에반을 위해 쓰려던 안락사 비용이 조금씩 줄어가는 동안, 불현듯 에반이 사라지고 만다. 그날 에반을 찾아 나선 찬성은 고속도로 휴게소 앞에서 의문의 자루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의 반려伴侶는 한 존재는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잘 나타내는 단어다. 그런 점에서 서로는 함께 성장하는 관계다. 찬성이 에반을 키웠지만, 반대로 에반도 찬성을 키운다. 할머니가 찬성을 키우지만, 찬성도 할머니를 키운다. 때로는 이러한 관계가 고통과 버거움으로 다가올 때도 있으며 그 중심축이 한 당사자에게 크게 기울어 있을 때도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축은 한때는 반대로 기울었을 때도 있었던 법이다.
그러나 소설 속 반려 관계들을 개인들의 책임과 노력에 달려 있는 것 정도로만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키워 가는 유대적 관계에 있는 개인들이 이루는 사회라는 집단은 그곳에 속한 모든 비유대적 개인들을 키워 내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찬성과 할머니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그들을 결코 키워내지 못한다. 힘껏 중심을 향해 달려보지만 변두리에서 선 그들은 그렇게 애써서 겨우 변두리를 배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사회에서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죄를 느끼는 일과 용서를 구하는 일은 착한 심성을 가진 이들의 몫이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울 때면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찬성이 용서의 뜻을 묻자, 할머니는 '한 번 봐달라는 뜻'이라 대답한다. 대체 무엇을 봐달라는 걸까. 그것은 어쩌면 안락사의 딜레마와 비슷한 맥락에 있는 것은 아닐까.
'주위는 더 어두워졌다. 찬성이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끌고 고속도로 옆 비포장길을 걸어나갔다. 몇몇 차들이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휙휙 지나갔다. 찬성이 고개 숙여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너무 오래 사용한 탓에 기기에서 열이 났다.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_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중
'책 > 책 읽고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건축, 좋은 공간에 대한 고찰: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0) | 2019.07.09 |
---|---|
<풍경의 쓸모> 김애란: 새로운 바깥과 안을 발견하는 일 (0) | 2019.07.02 |
문학은 과연 끝났는가 그렇다면 왜 써야 하는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0) | 2019.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