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철학자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논리철학 논고>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철학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모든 철학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대한 유산도 내던지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거나 가정 교사를 하며 살아갔다. 철학에서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철학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라고 깨닫고 16년의 공백을 깨고 나이 마흔에 철학에 복귀한다.
최근에는 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고 소동을 벌이며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다. 문학 따위는 결국 경제 과정에 좌우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학보다는 오히려 공학이다, 과학이다, 라고 말하며 문예비평이나 소설을 써서 일당을 벌려는 작자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문학부 교수이거나 한다. 문학부에 속한 학과를 나왔으면서 문학이나 철학 따위는 무력하니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지껄이며 로비 활동을 하자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철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철학과를 그만두어야 한다. 문학이 끝났다면 문학에 종사하는 걸 그만두어야 한다. 종말론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서 보면, 이 '끝'은 단순한 끝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에 대한 우리의 넓은 정의에서 보면, 책을 내는 것도, 사람들 앞에서 변설을 늘어놓는 일도 그만두지 않을 수 없다. 뭐든지 결국은 경제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경제학자가 되면 좋았을 걸 그랬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의견으로 정치를 좌우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관료나 정치가가 되면 좋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줄 알고 있었다니.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것은 지금까지 장황하게 증명해온 그대로이다.
확인한다. 문학이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달리 할 말이 있을 텐데도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고 말하며 뭔가 말한 듯이 우쭐해져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특권적인 시작이나 끝이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동안 역사상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병든 사고의 형태가 있다. 이런 사고는 놀랄 만큼 유치한 것이며, 사실 가장 질이 나쁜 종말론이라는 것도 지적했다. 이렇게 완전하게 병든 사고의 형태가 터무니없이 만연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삶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라. 유감스럽게도 비평이나 사상이나 문학을 칭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고에 완전히 빠져ㅆ다. 그것이 얼마나 놀랄 만한 참화를 초래하는 사고와 같은 형태인지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 해왔다.
그러나 이런 종말론적인 사고, '현재'에서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의 끝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병든 사고는 사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새롭지 않다. 새롭기는커녕 정말 맥이 빠질 만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유사 이래 줄기차에 말이다.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는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말해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만은 새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도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감이다. 그런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괴테나 실러의 시대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문학과 황금시대였다. 그런데 그들조차 문학은 끝났다고 비관적인 말을 했다. 나는 뭐랄까. 좀 짜증이 난다. 너희들은 휠덜린을 인정하지 않았잖아, 너무 냉담했잖아, 하고 말하고 싶어진다.
기껏해야 최근 100년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아, 문학은 죽었다, 철학은 죽었다, 하는 잠꼬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함께 끝났다고 하면 될 뿐인 이야기다.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지 5000년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을 차례로 썼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가 소설을 썼던 시대를 황금시대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들은 팔리지 않는다, 문학이 놓인 환경이 좋지 않다, 시대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 들었던 모든 위대한 이름에 대한 모욕이다. 훨씬 가혹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았으니까.
그래도 창의와 여러 가지 궁리를 거듭하며 말을 계속 자아내왔으니까. 터무니없는 노력을 언어에 쏟아부었왔으니까. 왜일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당연하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없다. 왜 쓸까? 왜 계속 쓰는 걸까?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는가? 달리 할 일이라도 있는가?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라고.
패배가 두려운가? 내기에 지는 것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역시 최후에는 그를 등장시킨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의 4부다.
'소심한 모습으로, 수줍게, 어색하게,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처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몰래 옆길로 새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대들은 주사위를 잘못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자들이여! 그 실패가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그대들은 도박자, 그리고 조소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늘 하나의 거대한 도박과 조소의 탁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그대들 자신에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의 완성이 불충분하거나 반쯤밖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반쯤 부서져버린 사람들이여! 그대들 내부에서 밀치락달치락하면서 서로 밀치지 않는가 - 인간의 '미래'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 본 글은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 모음 (p.245-247, 251-303)에서 발췌 및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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