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가을이 깊네요. 밖을 보니 은행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후드득 머리채를 털고 있어요.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잘 될거야,라는 말과 잘 되지 못하고 속절없이 스쳐지나가 버리는 청춘의 시간들. 그럼에도 청춘의 시기는 아름답고 소중하다, 말하기에 오늘날 청춘은 꿈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결국 쓰러져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할 때가 많다.
많은 경우 무기력은 좌절에서 온다. 그런데 좌절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노력했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더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인식, 아, 어쩌면 이 사회는, 이 시스템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었구나 하는 현실 직시의 허망함을, 꿈과의 괴리를 체득하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수인은 말한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은 '좀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을 뿐이라고. 그러한 허덕임 속에서 청춘들의 젊음이니, 도전이니, 가능성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들은 헐값에 팔려 나가고 이내 버려진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력, 학벌, 인맥과 같은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대부분 청춘의 효용은 딱 그만큼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저도 그걸 잘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날 눈뜨고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이 돼 있더라고요. 이전에도 채무자. 지금도 채무자.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오십대 남성의 강의를 들었어요. 너무 빤해서 들을 게 없는 강연 같죠? 맞아요, 언니. 그런데 그 빤한 게 사람 맘을 막 쥐고 흔들데요? '꿈'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수인은 다단계 업체에 빠진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보다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종국에는 돈도, 사람도, 시간도 모두 잃은 수인은 학원에서 일할 때 만났던 제자였던 혜미마저 여기에 끌어 들인다. 혜미는 생활고와 빚, 파탄난 인간 관계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입원한다.
수인은 최선의 노력을 함에도 어찌할 수 없는 서른, 자신의 삶, 그 삶을 에워싼 구조 속에서 결국 좌절하며, 쓰러지고,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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