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회의 외벽, 네온 사인을 통해 반짝 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문구를 보며, 사랑은 너무도 쉽게 왜곡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타인이 정의될 수 없는 것처럼 정의될 수 없는 활동이다. 정의될 수 없다는 건, 특정한 범위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 또 그래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과 '사랑'이 정의되고 있지는 않은가.
자크 엘룰은 기독교가 뒤틀렸다 말하며,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성경 본문에서 찾고자 했'음을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성경의 메시지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필요에 의해 사용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시대에 부합하는 하나의 도덕으로 자리 잡는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권력이 되었고 또한, 권력을 위한 도구가 됐다. 가령, '황제는 본질적으로 제국의 통일을 보장하기 위하여 교회의 통일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이 순간부터 국가의 선전기구로서 사용된다. 교회는 기독교의 복음과 가이사를 통해 표명된 하나님의 뜻을 동시에 보급한다. 교회는 이것이 예수의 생애와 인격에 모순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왕들 및 황제들과 더불어 서로 좇은 권력의 행사에 의한 왜곡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 인해 교회는 비통하고 우스꽝스런 결과들을 야기시킨다. 교회는 하나의 정치적 권세가 되지만, 항상 높은 지위에 자리잡았거나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 권세를 위해 봉사한다.'
자크 엘룰은 '뒤틀려진 기독교'를 해체하며, X를 제시한다. X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와 사역이요, 둘째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존재이며, 셋째로 진리와 사랑 안에서의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이다. (...) 기독교라는 말은 그것의 왜곡에 불과한 이데올로기적이며 사회학적인 운동의 경우에만 사용할 필요가 있다.'
2천년 전, 짧게나마 이 땅을 다녀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복잡한 도심 속에서 하나의 도덕으로, 하나의 정의로, 하나의 권력으로, 그것들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역사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 또한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엘룰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동의한다.
'히브리 성경은 어느 곳도(심지어 지혜서들까지도) 철학적 구조물이나 인식의 체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히브리 성경은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진리를 드러내거나 감추기로 작정된 신화가 아닌, 연속되는 이야기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인 책이나, 영지주의적 계시를 담은 거룩한 책, 또는 완전한 인신록적 체계나 완벽한 지혜 등을 보내지 않고 한 인간을 보내셨다. 그와의 관계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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