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어김없이 중고 서점에 들렀다가 집어들게 됐다. 내가 중고 서점에 들리는 건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꼴인데, 그건 머리를 자르고 미용실을 나오면 그곳에 중고 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중고서점에 가는 건 일종의 기분 전환 같은 것이다. 어디, 좋은 책이 싼 값에 나오진 않았나 하는 마음으로 서점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간다.
이번에는 로베르트 발저(1878~1956) <산책자>라는 책을 집어왔다. 이 책은 몇 달 전 신간으로 출시됐을 때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살까?'했던 책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책을 사지 않았고, 그럼에도 <산책자>라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를 가진 책을 잊지는 않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서 조금 정돈된 생각을 적어보려 했지만 그러는 동안 다른 책을 읽게 되는 바람에 이 글을 적게 됐다. 책은 절반정도 읽었는데, 이 책은 발저의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책인 거 같다. 책 초반부에 나오는 문장들이 인상깊다.
* 나는 시간에 현혹당하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듯이 시간에 말을 걸었고, 시간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얼굴이 있는 듯 한참 쳐다보았고, 시간 또한 묘하게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떨 때는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요하고, 소리 없고, 말없이 나는 그냥 살았다. 주변의 모든 사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누구도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나는 하루종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나 감미로운 생각이었는지. 아주 드물게 슬픔이 나를 방문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무모한 무용수처럼 구석진 내 방으로 불쑥 뛰어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p. 8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이 대게 그렇듯 그들은 어떤식으로든 '변두리'라 불리는 곳으로 비껴나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서 오랜만에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서, 지난 날 내가 찍었던 '쓸모 없는 사물들'을 담은 사진들을 떠올리며 또 다시 쓸모 없는 사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포착이었던가. 아주 드물게 슬픔이 나를 방문했다.' 발저의 말을 나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발저는 가난했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한다. 은행 사무원, 공장 노동자, 하인, 사서 등의 직업을 가졌다 한다. 그리고, 20여 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으며 걷기와 쓰기에 강박적으로 몰두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날, 산책을 하다 눈밭 위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다음은 책에서 꼽은 발저의 문장들. 아니, 문단들이다.
* 그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오후, 나는 마침 저녁햇살을 듬뿍 담아 장밋빛으로 환해진, 영롱한 사랑스러움이 넘실대는 그녀의 텅 빈 방으로 들어갔다. 그 가엾은 여인이 얼마 전까지 걸치고 다니던 옷가지와 소지품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치마, 모자, 우산과 양산 그리고 바닥에는 작고 연약한 장화. 그 기괴한 광경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애수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너무도 이상하고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혀 마치 나 자신이 죽은 것 같았으며, 내가 늘 위대하고도 아름답게만 여겼던 의미심장하고도 풍부한 삶이 한순간에 파열하여 왜소하고 초라하게 움츠러드는 것만 같았다. 허무와 덧없음, 이 의미를 그 순간만큼 생생하고도 가까이 실감한 적이 없었다. 이제는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물건들과 황금빛 저녁햇살이 보내는 축복의 미소로 가득 찬 방을 바라보면서, 나는 꼼짝없이 서 있었고 더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말없이 우뚝 선 상태에서 겨우 풀려나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삶이 내 어깨를 붙잡았고, 비범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순간처럼 아름다웠다. 조용히 나는 그곳을 떠나 거리로 나섰다. p.17
* 하지만 영혼이란, 내가 그것의 소리를 들어본 바로는 너무나 어둡고 무가치할 뿐이다. 나는 영혼의 소리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영혼의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건 오로지 지나치게 지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실에 서 있으면 내 사지는 서서히 사람들이 불을 붙여 태우고 싶어지는 그런 나무 토막으로 변해간다. 책상과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한 몸이 된다. ... 오늘까지의 내 삶은 돌이켜보면 내용 없이 텅 비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내용 없이 이대로 죽 전진하리라는 확신이 들면서, 단지 불가피한 활동만을 수행하며 그냥 잠든채로 살라는 명령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한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현장을 잡아서 혼내기 위해 살금살금 몰래 다가오는 상사의 역겨운 숨결이 등 뒤에서 느껴지면, 그제야 뭔가를 부지런히 하는 척할 뿐이다. p.35
* 누구나 진실을 말할 때는 정중할 수 없는 법입니다. 나는 별을 사랑하고, 달은 내 은밀한 친구입니다. 내 위에 있는 것은 하늘이지요. 살아 있는 한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입장입니다. p.76
* 내 경험에 의하면 작가들, 시인들, 희곡작가들은 자신의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방에 난방을 거의 하지 않는다. "사람은 여름에 땀을 흘리니 겨울에는 반대로 약간은 떨어야 균형이 맞는 법이지."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적응력으로 열기와 냉기를 이겨낸다.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데 손발이 너무 얼어서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경우에는 그저 손가락에 따뜻한 입김을 호호 불어서 덥히면 그만이다. 혹은 관절의 유연성을 회복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서서 이런저런 스트레칭 동작을 해주면 된다. 그러면 금세 충분한 분량의 온기가 보충이 된다. 게다가 체조는 글을 쓰느라 혹사당채 지쳐 있을 것이 분명한 정신에 활력을 준다. 그밖에도 왕성한 창조의 에너지, 선량한 사고, 즐거운 발상, 그리고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시적 결의는 언제라도 이글거리는 난로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p. 99
* 진정한 시인은 먼지를 선호한다. 다들 잘 알다시피, 가장 위대한 시인이 소망하는 자리는 매혹적인 망각과 먼지 속이기 때문이다. 거장인 시인일수록 오래 묵은 고급 와인과 마찬가지 운명이라서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먼지 속에서 나와 영광의 자리로 승격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p.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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