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의 자유, 하면 흔히 책임을 떠올리지만 이는 시스템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방식 일 뿐, 실은 자유와 가장 가까운 단어는 불안이다. 그런데 왜 자유하면, 자꾸만 책임을 이야기 할까.
그건, 이 시대가 성과지향 시대이기 때문이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여겨지는 시스템은 권력을 따라 그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이는 한편으로 자유로웠다 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을 자책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자유로운 뜻을 따라 무언가를 자유롭게 택했을 때, 성과를 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와 같은 말은 보통 실패했다면?이 된다) 하는 압박과 함께 책임이란 단어가 슬며시 등장하는 것이다.
자유를 이야기 할 때 책임은,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기 보다는 자유의 결과를 우려하는 하나의 방어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에서 책임을 강조하는 일은 결국 자유는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라는 전제와 함께 전형적인 성공 도식으로 이어진다.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지금을 인내하고 견뎌서 미래에 자유를 획득하라는 성취의 논리가 자유를 잠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유롭다. 즉 그는 혼자이고 고립되어 있고 사방에서 위협받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본가가 갖고 있던 부나 권력도 없고, 타인이나 우주와의 일체감도 상실하고, 그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과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낙원은 영원히 사라졌고, 개인은 혼자서 세계와 맞선다. 그는 무한하고 위협적인 세계 속에 내던져진 이방인이다. 새로운 자유는 강한 불안감과 무력감, 의심과 고독과 동요를 낳을 수밖에 없다. 개인이 성공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이런 감정들을 억눌러야 한다. p.75
개인이 실종되어버리는 도시의 거대함, 산처럼 높이 솟은 빌딩들, 끊임없이 청각적 포격을 퍼붓는 라디오,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바뀌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문의 헤드라인, 백 명이나 되는 소녀가 개성을 버리고 시계처럼 정확함을 과시하면서 강력하지만 원활한 기계처럼 연기하는 쇼, 고동치는 재즈의 리듬... 이 수 많은 세부들은 성좌 같은 한 무리의 표현이며, 개인은 통제할 수 없는 차원에 의해 그 무리와 직면하는데, 거기에 비하면 개인은 아주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행군하는 병사처럼, 또는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처럼 남들과 보조를 맞추는 것뿐이다. 그는 행동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독립된 중요한 존재라는 의식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p.141
2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자본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베버의 이론은 흥미롭고 또 잘 알려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한 챕터에 걸쳐 해당 교리가 당시의 중산층들에게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점을 서술하고 있는데, 새로운 종교적 교리는 이제 막 싹을 틔운 상업주의 시대의 초입에서 서서히 배제당하기 시작하는 중산층의 무력함과 더불어, 해체되어 가는 사회적 소속감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떠안게 된 고독감을 달래는 데 사용되었다 한다.
자신의 무력함과 본성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애를 그 죗값으로 여기고,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회의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또한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면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적어도 신이 구원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가운데 자기도 속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겁먹고 뿌리째 뽑혀 고립된 개인, 새로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개인의 인간적 욕구에 대한 해답이었다. (...) 이 성격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바로 그 자질들 - 일하려는 충동, 절약하려는 열정, 가외의 개인적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 금욕주의, 강박, 의무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된 성격 특성들이었다. p.111
3 현대인은 자유롭지만, 자유로운 환경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유란 과연 자유라 할 수 있는 것인가. 홀로 남은 존재의 발견이 흔히 자유로 여겨지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 한 속성인 고독의 모습에 가깝다. 자유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를 향해 갈 수 있는, 또 가지 않을 수 있는 능동적인 태도의 창조적 실천과 그 실천을 가능케 하는 환경적 조건을 통해 가능하다.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마비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세계를 구조화한 그림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다. 사실들은 구조화된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만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자질을 잃고, 단지 추상적이고 양적인 의미만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사실은 '또 하나의' 사실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사실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뿐이다. 라디오와 영화와 신문은 이 점에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떤 도시가 폭격을 받아 수백 명이 죽었다는 뉴스 보도가 끝나자마자, 또는 뉴스를 보도하는 도중에 비누나 포도주 광고가 뻔뻔하게 끼어든다. 방금 뉴스를 보도한 아나운서가 정치 상황의 심각성을 전할 때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목소리, 암시적이고 매력적이고 권위 있는 목소리로 이제는 뉴스 방송에 돈을 낸 특정 상표의 비누가 품질이 좋다는 것을 청취자에게 설득한다. 뉴스 영화는 어뢰 공격을 받은 선박의 사진을 내보낸 다음, 바로 패션쇼 사진을 내보낸다. 신문은 과학적이거나 예술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보도한 것과 같은 지면에 그에 못지않게 진지한 투로 사교계에 처음 나가는 상류층 여성의 고리타분한 생각이나 아침식사 습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귀로 듣는 것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흥분하지 못하고, 우리의 감정과 비판적 판단은 방해를 받고, 결국 세계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조롭고 무관심한 성질을 띠게 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삶은 모든 구조를 잃어버린다. 삶은 수많은 작은 조각들로 이뤄져 있고, 각 조각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하나의 전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개인은 조각그림 맞추기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이 조각들을 끌어안은 채 혼자 남겨진다.
고립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바깥세상에 비해 철저하게 무력하고, 따라서 바깥세상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의 통일성은 적어도 그에게는 깨진 상태이고, 그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기준점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히고, 결국은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원칙을 의심하게 된다. 무력감과 회의는 둘 다 삶을 마비시키고, 인간은 살기 위해 자유 - 소극적인 자유 - 로부터 달아나려고 애쓴다. 그는 새로운 유대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이 유대는 원초적 유대와는 다르고 권위나 사회 집단의 지배를 받지만, 사람은 그것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자유에서 도피해도 그가 잃어버린 안전은 되돌아오지 않고, 그가 자신의 자아를 자기와는 별개의 실체로서 잊어버리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는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고 허술하지만 새로운 안전을 발견한다. 그는 혼자라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자아를 잃는 쪽을 택한다. 그리하여 자유는 -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 새로운 유대로 이어진다. p.265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고, 심리적으로는 그 낱말의 라틴어 어원인 'sponte'가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것 - 자신의 자유의지로 -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활동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 경험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의 성질을 뜻한다. 이 자발성에 대한 한 가지 전제는 인격을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고 인격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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