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따에서 우붓으로 넘어오며 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버렸다. 오래 쓰기도 했던 캐리어였고, 바퀴도 하나가 말썽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붓으로 바이크를 타고 넘어가면서 가져갈 수 없었다. 때가 됐구나 싶었다.
발리에서 한 달가량 머물 예정이지만 짐이 많지는 않다. 정리하고 보니 노트북 가방 하나와 옷 서너 벌이 들어갈 작은 가방 하나면 됐다. 가능한 가볍게 여행하려고 한다. 지난 자전거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짐이 가벼워야 몸도 마음도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발리에서 2주 가량이 지났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을 맞고, 이따금 쏟아지는 스콜에 흠뻑 젖는다. 옷은 헤지고, 피부는 타들어 가고, 어깨에 둘러맨 가방도 색이 바래간다.
내게는 말끔한 옷, 새로운 신발과 가방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깨끗하고 좋은 옷은 때가 타고 헤지게 될까봐 걱정하는 마음에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고, 새로운 신발과 가방은 몸에 맞지 않아 길들여지기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여행자인 내게 필요한 건 편하고, 가벼우며, 내 몸에 잘 맞는 것들이다.
발리에서의 여정은 자적(自適)하는 시간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애써 비워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애쓰지 않아도 비워지게 되는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비로소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공백. 그곳에는 이제 무언가 찾아와 깃들 수 있다.
가벼운 마음이 가벼운 삶과 선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이란 건 오히려 비울수록 단단해지고 중심이 잡히는 법이라는 걸 체득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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