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엔 품을 수 있는 너비만큼의 바다가 있다.
발리에 도착한 둘째 날에야 비치에 왔다. 일몰이 멋지다는 스미냑 비치였다. 첫째 날에는 바깥에 나가보지 못했는데, 비행 여정이 너무 힘들기도 했거니와 높이가 잘 맞지 않는 의자와 책상에 앉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구석의 테이블 앞에 앉아 일을 발리에 왔는데 아직도 바다를 못봤다니! 탄식하며, 어서 바다를 보러 가야해. 어서.라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그러며 일을 하는 틈틈이 비치의 위치와 근처 레스토랑, 일몰 시간들을 검색해두었다.
일을 마치고는 바로 고젝 바이크를 타고 스미냑 비치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한 눈에 담기지 않는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해질 무렵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예상 밖 풍경이 두 눈에 가득 차올랐다. 서퍼들은 보드를 들고 바다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해수욕을 하고 있었으며, 여행객들은 비치에 줄지어 늘어선 레스토랑의 샌드백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 마음에 품고 있던 바다가 얼마나 작고 좁았는지, 그간 얼마나 잔뜩 웅크린채 고민하고 있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발리에 온 이유
서른 셋. 이제는 모두가 정착해야 하는 나이라고 말했다. 발리에 나오기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번 만큼은 서울에 있고 싶었다. 스물 넷에 떠났던 영국 워킹홀리데이. 스물 일곱에 떠났던 호주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그 사이와 이후의 수많은 도보 여행, 자전거 여행, 로드트립 등. 20대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여행을 하며 보냈던 나는 이 나이쯤이면 서울 어딘가에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다.
이번 출국에는 새롭게 일하게 된 회사의 영향도 컸다. 재택 근무를 하게 되었고,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했다. 시차가 1시간인 발리에 가도 인터넷만 잘 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되어 적응도 제대로 못한 시기였지만, 자취방의 계약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떠나도 괜찮을까?
떠나도 괜찮다는 판단과 이제는 자리좀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사이에서 며칠 밤을 고민했다. 가도 될까. 정말 가도 될까. 발리에 정말 혼자 가도 될까. 방 안에서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인터넷은 잘 될까. 숙소는 잘 구할 수 있을까. 음식은 잘 맞을까. 카드 결제는 잘 될까. 사람들은 친절할까. 충전기에서 스파크가 튀지는 않을까(저번 인도 여행 때는 충전 때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바이크를 빌려야 할까. 걱정은 끝이 없었고, 질문의 방향은 길을 잃어 갔다.
그렇게 고민하며 유튜브에서 발리 브이로그를 찾아봤다. 코로나 때문에 텅 빈 발리의 모습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귀국한다는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단적인 예로 코로나가 다시 터진다면,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매일 회사로 출근해야 한다면 여행은 지금보다 쉽지 않을 터였다. 기회가 될 때 갈 수 있는 게 맞았다. 티켓을 구매했다. 2주 후 출국이었다.
발리에서 보낸 첫 일주일
발리에 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안정’이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앞선 고민들은 어떻게 됐을까? 인터넷은 가끔 정전이 되서 먹통이 되긴 했지만 대부분 잘 됐다. 숙소는 생각보다 지출이 컸지만 마음에 드는 곳으로 구했고, 모든 음식이 입에 잘 맞지는 안았지만 자주 가는 맛집을 몇 개 찾았다. 카드를 한 번 잃어버렸지만, 다른 카드로도 결제가 잘 됐다. 사람들은 두말 할 것 없이 친절했다. 충전기에서는 단 한번도 스파크가 튀지 않았고, 작고 아담한 스쿠피도 빌렸다. 발리에 혼자 와도 정말 괜찮았다.
이제는 일을 마치고 스미냑 비치에 가서 일몰을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곳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넋놓고 한동안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파도들이 가늠할 수 없이 먼 곳에서 이곳으로 밀려와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부서질 줄 알지만 기어코 밀려오는 파도들.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바다에도 작은 용기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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