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는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가 반복될 거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고, 새로운 파도와, 음식, 사람과 함께할 거라는 사실에 기대를 품게 된다.
발리에 오기 전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풀빌라에서 한 달 살기였다. 근사해 보였다. 개인 수영장이 있는 프라이빗한 숙소에서 일하며, 먹고, 쉰다는 사실이.
이제까지 대부분의 해외 여행에서는 호스텔이나 저렴한 호텔에서 묵고는 했다. 혼자서 여행을 했기에 사람을 만나고 싶기도 했거니와 언제 어디서나도 무척 잘 자는 나였다. 뉴질랜드에서 두 달간 자전거 여행을 할 때는 매일 같이 길바닥에서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비가 새지 않은 천장이 있다면 어디서도 잘 수 있다는 지론을 갖게 되었다. 그런 내가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원래는 서울 월세만큼을 지불하며 발리에서 한 달 살이를 해보려했다. 그런데 유튜브에서 봤던 것과는 다르게 월 7,80 하는 풀빌라는 구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아니, 그런 풀빌라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 두 세배에 가까운 금액이 스미냑에서는 필요했다.
단지 쉼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고 일도 해야했기에 방을 구하는 기준이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있어야 했고, 와이파이가 잘 되어야 했으며, 방음도 필수였다. 숙박 앱을 한참 물색하다 조건에 맞는 빌라를 찾았다. 가격이 부담되긴 했지만, 언제 또 발리에 오겠냐 싶었다. 기회 비용을 빙자하여 한 달 간의 숙박을 예약했다.
이곳에서 수영장 다음으로 내가 좋아했던 건 방에 있던 알렉사(아마존에서 만든 인공 지능)였다. 알렉사를 부르고, ‘플레이 더 칠 뮤직!’이라 하면 알렉사는 스포티파이에서 칠한 뮤직을 틀어주곤 했다.
하루의 반나절은 일을 해야 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일을 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영장에 뛰어들고, 그네에 누워서 일을 하기도 하고, 저녁에는 자쿠지에서 목욕을 하고 맥주를 마셨다.
발리에서의 루틴
발리에서 본격적인 한 달 살이가 시작되었고 내게도 루틴이 생겼다.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어쩌면 서울에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루틴이었지만 마음만은 훨씬 가벼웠다.
머무는 장소, 만나는 사람, 보내는 시간이 달라졌고, 그것들에 자연스레 휩쓸렸다. 떠나오기 전과 달라져 있었다. 피부도, 옷차림도, 말투도, 생각도, 바람도, 욕망도, 행동도, 반응도.
한 달 살기에 대하여
한 달 살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은 제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 시간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말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렇다고 시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여유롭게 질문의 대답을 찾아갈 수 있다. 한 달 살이는 짧지도, 길지도 않게, 느슨하지도, 타이트하지도 않게, 얕지도 깊지도 않게 낯선 곳에 머물며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새로운 것들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존의 일상과 다른 틈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비대해진 자아를 내려놓고 기꺼이 변해가기로 결심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 달 살기는 여행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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