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카페에 오전 출근 멤버들이 있다. 서로의 이름은 모르지만 커피 한잔이나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한동안 옆자리에서 함께 일한다. 여느 직장인들이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듯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발리와 디지털 노마드의 현실
발리는 디지털 노마드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애초에 잘 알려진 휴양지이기도 하고,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비치, 친절한 사람들, 작업을 위한 원활한 인터넷과 업무 환경이 갖춰진 곳이기도 하다. 발리에서 머물며 일을 한다니.. 정말 멋지고 부럽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정해진 하나의 장소에 머물며 일을 하기에 이동의 자유가 많지 않은 직장인에게는 어디에서나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많은 심금을 올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디지털 노마드에 투영된 세간의 기대와 환상과는 달리 이들은 일하는 장소에 대한 유연성을 확보한 직군일 뿐 다른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경험한다. 어디서나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어디에도 일을 할 곳이 없다면, 어디라도 가서 일을 해야 하는 게 디지털 노마드의 현실이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여 원하는 어디로나 가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동의 자유는 실제 이동을 담보하지 않고, 자유 의지가 실제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이동하려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과 돈, 에너지와 같은 여건이 필요하다. 디지털 노마드들은 디지털 기기를 들고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 특별한 노동의 티어에 존재하는 이들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디지털 노마드가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유유자적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디지털 노마드들은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에 할애한다.
낭만과 현실
디지털 노마드와 낭만은 사실 거리가 먼 단어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디지털 노마드들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어떻게 노력하는지. 누군가 실제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낭만적인 삶을 상상하는 낭만가가 아니라 현실과 부딪치며 나아가는 개척자일 가능성이 높다.
노마드와 업
노마드들은 직보다는 업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업과 직은 다르다. 직은 소위 말하는 직업으로 부여되는 타이틀이고, 업은 살아가며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이자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노마드는 업을 추구해가는 다양한 모습을 일컫는 말이지 정형화된 타이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마드를 재정의하자면 노마드란 업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업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또한 이를 안다 하더라도 실제로 업을 추구해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항구에 남아 너머로 여정을 상상할 뿐이다. 업을 추구한다는 건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유에 따르는 불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안정적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머물러 있기보다 떠나기로 결심하며, 익숙한 무엇에 적응하기보다 새로운 선택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삶의 변동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만의 성공을 새롭게 정의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업을 추구하는 노마드의 정체성은 이동의 여부 뿐만 아니라 이동의 이유에 의해 결정된다. 아늑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정적인 직의 타이틀이 아닌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업을 추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다양한 노마드들의 결을 만들어 낸다.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나아가는 배의 모습처럼 모든 노마드들은 어느 정도는 자유롭고 어느 정도는 불안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바로 항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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