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내게서 가장 먼 곳에서 내게 가장 가까워지는 일이다.
발리를 떠나기 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우붓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 가량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낀따마니 지역의 바투르 산이었다. 스미냑에서 한 달 가량 머물렀던 에어비엔비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에서 차를 빌렸다. 우붓까지 1시간. 우붓에서 또 1시간을 달려 낀따마니 바투르 산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진 상황이었고, 오는 길에 많은 비가 내려 운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예약했던 숙소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 1시간 가량 또 해매다가 결국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우여곡절 끝에 곤한 몸을 침대 위에 누일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여정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바투르 산에 오고 싶었던 건 그간의 발리 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발리에서 머무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시간을 해변에서 보냈다. 지난 글에 파도 이야기가 많은 것은 하루 종일 파도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산 중턱에 와 있었고 새로운 단어들이 내게 찾아왔다. 산. 초록. 푸르름. 일출. 햇살. 희망. 의지. 사람. 공간…그러면서 동시에 익숙하게 느끼고 있던 단어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해변. 햇살. 노을. 맥주. 음악. 파도… 모든 것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과 함께 다행이다 싶었다.
누군가에게 여행이란 가볍게 기분을 전환하거나 며칠 휴가를 내어 좋은 곳에 머물며 맛있는 음식들을 맛보는 시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무는 곳이 곧 일을 하고, 먹고, 살아가는 터가 되는 내게는 여행이 가지는 함의가 꽤나 의미심장하다. 몇 번의 길고 짧은 여행을 통해서, 그렇게 내 마음에 오고간 마음가짐들을 기록해 두었던 글을 통해서 달라지는 여행지의 환경이 내게 미치는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붐비는 도시로 갔던 때는 그곳의 단어와 문법을 경험했고, 한적한 바닷가에 있을 때는 또다른 단어와 문법을 경험했다.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용하는 언어를 결정하는 일과도 같았다. 발리.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도착한 나는 이곳의 단어와 문법과 함께 새롭게 시작됐다. 그렇게 나는 내게서 가장 먼 곳에서 내게 가장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문득 뒤를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더 나아가기 보다는 머물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떠나오기 전에 머물던 공간. 함께 밥을 먹던 가족과 친구들. 자주 가던 골목과 카페. 술에 취해 걷던 밤 거리... 일상의 이름으로 파묻혀 있던 순간들이 문득 빛나는 그리움이 되어 여행의 문장들을 비추는 때가 있다. 나는 그 순간이 여행의 한 매듭이 완성되는 때로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라 생각한다.
이번 챕터는 여기까지일 거 같다. 떠나올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장들이 내게 남았다. 여행자의 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음이 옹졸해질 때마다 스미냑의 바다를 기억해야지. 걱정이 앞설 때마다 우선 티켓을 끊어야지. 초조하다면 잠잠히 내게 맞는 파도를 기다려야지. 욕심이 생긴다면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야지. 이번 여행를 통해 찾아온 마음가짐을 잘 보듬어야지. 스스로를 조금 더 믿고 신뢰해야지. 또 떠나오고 떠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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