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린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다. 수용소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병에 걸리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현장에서 그는 하나의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성자처럼 행동하고 또 누군가는 돼지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강제 수용소라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으며, 그러한 의지의 경향(선택)에 따라 각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의지와 선택
언뜻 생각하면 이토록 비참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이성을 잃고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으로만 행동할 거 같다. 그러한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다양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경우, 결국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채워지지 않은 굶주림의 욕구를 달래기 위해 하나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주장과 달리 강제 수용소에서는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이가 더욱 선명해졌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었고, 성자와 돼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차이의 이유
이러한 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빅터 프랭클린은 실존주의적 맥락에서 이를 설명한다. ‘인간은 실존적인 존재로서 조건에 따라 결정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어떤 상황이든간에 그는 상황에 굴복하든지 또는 이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어떠한 순간에도 변화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또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에도 바로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의미와 책임
빅터 프랭클린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삶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강조한다. 내가 삶에게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이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그 질문에 대답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의미란 인간의 내면이나 정신적인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세상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태평한 마음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정신의 역동성이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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