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
정서와 관련된 모든 단어가 아날로그 영역에 있었어요. 반면에 디지털 영역은 모두 완벽함과 속도에 관한 단어들이었지요. (...) 모두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소멸시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사람들이 필름만의 느낌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사람들은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화질이라서 화질이 개선되기만 하면 디지털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사진의 양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죠. 더 이상 가족 앨범은 없고 인화된 사진도 없어요. 손으로 만지거나 흔들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지요.
(...) 우리가 직면한 선택은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가 아니다. 그런 단순한 이분법은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일 뿐이다. 1이냐 0이냐. 흑이냐 백이냐. 삼성이냐 애플이냐 하는 이분법적 구분은 허구다. 실제 세상은 흑도 백도 아니고, 심지어 회식도 아니다. 현실은 다양한 색상과 수많은 질감과 켜켜이 쌓인 감정들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고 희한한 맛이 난다. 인간의 불완전함은 흠도 되지 않는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그런 복잡함에서 나오지만 디지털 기술은 그 복잡함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레코드판과 스트리밍 서비스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은 디지털 파일로 듣는 것에 비해 효율적이지 않다. 더 번거롭기만 하고 음향적으로 더 뛰어나지도 않다. 하지만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하드 드라이브의 음악을 꺼내 듣는 것보다 더 큰 참여감을 주고, 궁극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레코드판이 꽂힌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디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행위, 그리고 레코드판의 표면을 긁는 듯한 음악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직전 1초 동안의 침묵.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손과 발과 눈과 귀, 심지어 (레코드 표면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가끔은 입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감각을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 디지털화는 편리함의 극치인 반면, LP는 경험의 극치다.
종이
모로스는 하루에도 수천 통의 이메일을 받아 대부분 보지도 않고 삭세하지만 책상 위에 도착하는 봉투는 빠짐없이 열어본다. 구글과 페이스북도 정재계의 리더들에게만큼은 공들여 만든 인쇄물을 보낸다. 종이는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종이 인쇄물은 바로 삭제되는 첨부파일보다 비서들을 통과해서 미셸 오바마나 빌 게이츠 같은 명사들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연락처를 모아 고객 관리 데이터베이스와 동기화하고 링크드인 프로필에서 손쉽게 검색하는 시대에 명함은 구시대적 도구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명함은 첫인상을 오래 남게 해 준다.
테크놀로지와 미래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개선되고, 바뀌고, 완전히 재편되는 것들을 보게 된다. 우리의 자동차, 집, 일, 섹스 라이프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기술의 진보라는 매끈하고 질서 정연한 내러티브 속에서 최신 기술은 항상 낡은 기술의 생명을 끊는다. 음악 감상법은 직접 듣는 것에서 밀랍 원통, 레코드판, 카세트테이프, CD, MP3 다운로드를 거쳐 이제는 무선 스트리밍 서비스로 진화했다. 디지털 기술이 바꿔 놓은 일상 속의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음악 감상의 미래는 더 나은 음질에 더 저렴하고 더 빠르고 더 쉬운, 완전히 가상의 것으로 변화할 듯 보인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디지털화가 가능한 사물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듯했다. 잡지는 온라인으로만 존재할 것이고, 모든 구매는 웹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며, 교실은 가상공간에 존재할 것이었다.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는 일자리는 곧 사라질 일자리였다. 프로그램이 하나 생길 때마다 세상은 비트와 바이트로 전환될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유토피아에 도달하거나, 아니면 터미네이터와 마주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날로그의 반격은 다른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기술 혁신의 과정은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 그리고 가장 좋은 것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혁신의 과정은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게 도와주는 일련의 시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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