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묵직한 단편을 읽었다. 안보윤 작가의 ‹애도의 방식›. 24회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학교 폭력 피해자인 동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동주는 승규로부터 학교 폭력을 당한다. 어느날 승규는 동주를 폭행하다 사고로 공사장에서 떨어져 생을 달리한다. 한순간의 사고로 잠재적 가해자가 된 동주는 승규와 그들의 가족에게 어떠한 애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애도가 왜 갑자기 그의 몫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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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문을 밀고 나와 오픈 팻말을 뒤집어놓은 뒤 퇴근한다. 터미널 안은 온통 캄캄하다. 터미널 밖도 캄캄한 건 마찬가지다. 나는 가로등 아래 빛이 고인 지점만 골라 밟으며 우산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훔쳤던 좋은 것, 내 손을 마주 잡고 은근한 온기를 전해주던 길이 든 가죽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그 역시 죽은 동물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는 집을 향해 걷는다. 마른 풀로 뒤덮인 들판을 가로질러, 좁고 긴 흙길을 걷는다. 몇 차례 잔불이 인 탓에 들판 군데군데가 검게 그을려 있다. 불은 모두가 잠든 새벽 치솟았다가 흙덩이에 막혀 시름시름 꺼졌다. 풀이 새까맣게 변했을 뿐 달라진 건 없다. 흐릿한 탄내를 맡으며 나는 걷는다. 여자가 여남은 걸음 뒤에서 나를 쫓고 있다. 여자는 불꺼진 대합실에서 마르고 긴 팔로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갈림길이 나올 즈음 여자의 걸음이 빨라진다. 동주야. 크게 숨을 들이쉰 여자가 나를 부른다.
동주야.
나는 멈춰 선다. 나는 항상 멈추고 듣고 대답하는 쪽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 소란한 미도파 안에서는 못 들은 척할 수 있지만 여기선 아니다. 공사가 중단된 상가 건물 코앞에서, 들판의 마른 정적 안에서 나는 멈춘다.
네게 꼭 할 말이 있어.
여자가 다가와 내 앞에 선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팔을 원숭이처럼 늘어뜨린다. 여자와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여자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이미 죽어버린 동물처럼 여자의 손은 차갑고 딱딱하다. 미안하다. 여자가 말한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게 만들어 미안했다고, 이제 자신은 성동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계속 돈가스 가게를 할 테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섬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해풍 맞은 시금치를 키우며 살 거라고 말한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진심이야.
여자가 말한다. 그러고는 뒤돌아 걷기 시작한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걸이다. 흙길이 끝날 즈음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릴 것처럼 평범하다.
나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거듭되는 상상은 현실보다 혹독했다. 나는 수없이 승규를 붙들고 수없이 승규를 밀쳤다. 매 순간 나는 필사적이었다. 오롯이 진심이었다.
-- 안보윤 ‹애도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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