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다 꺼내든 건 꽤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꽂혀있던 <2017년 현대 문학상 소설집>이었다. 나는 문학상 소설집을 자주 사는데, 최신 수상집을 사기보다는 책을 사러 중고 책방에 갔다가 발견하는 것들을 집어 오곤 한다. 정확히 어떤 책을 사다가 함께 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책도 분명 다른 책을 사다가 함께 딸려온 것이었다.
김금희 <체스의 모든 것>을 포함해 앞에 몇 편은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났고, 수상집의 제일 뒷편에 실린, 엄밀히 따지자면 이번 수상작은 아니고 지난번에 수상한 작가들의 최근 단편이 실린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이현 작가의 <서랍 속의 집>을 읽었다.
서랍 속의 집 줄거리
소설에는 집을 찾아 다니는 부부가 나온다. 전셋집 계약이 만료되고, 아파트 시세가 오른 터라 전세금 인상이 통보된 상황에서 둘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사기로 한다.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몇 집을 둘러보다 시세보다 3천만 원이나 싼 어느 집을 발견한다. 아이러니한 건 그쪽 세입자가 집을 보여주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사게 되면 살게 될 1703호를 놔두고 603호 집을 보게 된다. 거기나 여기나 집 구조도 똑같고, 다를 게 전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집을 보지 않고 집을 산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 그리고 지난 번에 보고 온 603호가 맘에 들었다는 점, 그래서 1703호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파트 계약을 마치고 찾아온 대망의 이삿날, 아파트 앞에서는 무수한 쓰레기 더미가 이삿짐 차에 가득 실려 나오고 있다. 부부가 이사 가려던 1703호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이었다. 1703호에 사는 전 세입자는 아내를 여의고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며 무슨 이유에선지 바깥에서 쓰레기들을 주워와 집에다가 쌓아놓으며 살았던 것이다. 집으로 들어서는 데 악취가 코를 찌른다. 몰골이 초췌한 한 남자가 집 밖으로 걸어 나간다. 주인공은 코가 아닌 귀를 막으며, 마루에 한 발을 내딛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왜 <서랍 속의 집> 일까?
소설의 제목은 왜 <서랍 속의 집>일까? 서랍을 열기 전까지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서랍은 기대가 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서랍의 용도가 증명하듯 별 생각없이 물건들을 던져 두기 마련인 공간에 가깝다. 그러니까 서랍은 저장의 공간임과 동시에 방치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2년 마다 전셋집을 찾아 옮겨가던 삶을 끝내고, 이제 20년 만기의 대출 자금을 갚게 된 부부를 축하하기 어려운 이 씁쓸함도 가볍게 서랍 속에 넣어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큼.)
부부의 집에도 아마 서랍이 있을 것이고, 그곳에는 이제 막 도장을 찍은 계약서와 잔고가 적힌 통장, 그리고 잡다한 서류들이 들어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서랍이 집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집이 서랍 속에 있고, 그 서랍 같은 집 속에서, 텅 빈 것도 아니고 쓰레기 더미에 덮이지도 않은 그 공간에서 부부는 살아가게 될 것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쓰레기는 치워질 것이고', 그들은 별 수 없이 새로운 공간에서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여' 살아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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