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괴로운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이어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을 연이어 읽게 됐다. 따지고 보면 자전적이 아닌 소설이 어디 있겠냐만, 저자 소개를 읽고보니 정말이지 <인간 실격> 소설 속 주인공 요조는 곧 작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데미안, 그리고 요조
<데미안>과 <인간실격>은 삶을 회의하고 질문을 성찰하는 두 주인공을 내세우나 둘은 전혀 다른 실존적 선택을 한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어느 이상을 따라 자신의 목소리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타파하며, 살아가는 일은 그것을 모두 껴안는 일이라 생각하며, 기준의 중심에 자신을 세운다. 그러나 요조에게 삶이란 선과 악을 고찰하는 문제가 아니다. 싱클레어와는 달리 가난한 환경 속에서 떠돌이처럼 살아가는 요조에게 던져진 질문은 살아가는 것,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다.
죄스러운 삶, 요조의 익살
그런 요조는 죄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묻는다. 흔한 오류는 죄의 반대말을 선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특정한 기준에 따라 판결지어지는 일종의 가치 판단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국가-사회가 형성한 법(기준)이 있다. 이 때, 준법하면 죄가 아니고, 위법하면 죄다. 그렇다면 죄의 반대말은 기준에 부합함 즉, 어긋나지 않음이다. 요조가 자신의 삶을 죄스럽게 느꼈던 건 보편적인 사회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이었던 것이다.
요조는 비틀거리며 홀로 서보려 애쓰지만, 도무지 살아가는 일의 죄스러움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런 요조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것은 '익살'이었다. 그는 여린 심정으로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테두리와 장벽 앞에서 익살을 연기했다. 그러나 결국 변두리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지 못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조를 죽인 건 요조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최선과 결론에 대한 진정성 있는 실천이, 결국 좌절과 허망함으로 이어질 뿐이었고, 그 앞에서 더는 무력한 생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익살스러웠던, '죄인'. 너무도 서글픈 명명과 형용이다. 오늘날 그러한 명명과 형용은 모습을 조금 달리하여 노력하는 '패배자', 열심히 살아가는 '빚쟁이', 꿈꾸는 '실패자'정도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는 아닐까. 더는 데미안처럼 내면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으며, 이처럼 어찌할 수 없는 명명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형용의 변용을 시도해보지만 결국 변하지 않는 현실과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각, 그리고 더 나은 선택으로서 많은 이들이 죽음을 택하는 건 아닐까.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사실이고, 따라서 바뀌어야 하는 건 형용이 아닌 명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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