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이것이다. 즉, 신 앞에서 혹은 신에 대한 생각으로,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 혹은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강화된 연약함 혹은 강화된 반항이며, 죄는 절망의 강화다. -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p.158
1. 카페에 왔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큼지막한 창을 통해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실내의 온기에 두꺼운 외투를 벗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엇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옆 자리에서 한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헤드셋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까요. 나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습니다. 얼마전 구매한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많은 책들 중에서 왜 이책을 구매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 성큼, 봄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를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의 말은 한동안 내 안에 쌓여있던 생각의 조각에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꽤나 긴 시간동안, '내가 되기 위해' 반항 중이었습니다.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변두리에서 또 다른 주류가 되기 위해, 나태가 주는 이 안락함을 즐기고 있던 것입니다. 나태와 안락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겁니다. 다만, 그것은 때로 무기력으로, 이내 절망으로 이어지는 상태들입니다.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 닻을 내리고 있는 집착심때문이지요.' 얼마 피터님이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피터님은 집착이라 이를 표현했지만, 비슷한 표현이 개신교에도 있습니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살아가는 일, 내려놓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념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2.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매대에 놓인 많은 책들 중에서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집어들었습니다. 서점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의 말은 간단하게 '너무 신경쓰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조금 더 행복할 것이며,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자신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백수를 잠시 전전했지만 현재는 파워블로거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고.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인생을 즐겼지만 조금 공허했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책을 덮고나니 키르케고르의 또 다른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나오는 윤리적 실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윤리적 실존자는 자신의 기준에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의 첫 단계인 심미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래서 충동과 감각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실존이 지향하는 바를 따지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또한 다른 자기 개발서와 비슷하게 이러한 윤리적 실존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해, 이제 다른 방식으로 노력해보라는 겁니다.
3.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서 살아갑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 아닌 신이라 말합니다. 신, 참 낡은 단어입니다. 너무 낡아서 구글 트렌드 들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꾸준히 관심을 갖게 하는 단어입니다. 나는 그 단어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지난 , 신앙의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신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변두리에서 또 다른 중심을 차지하고자 하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개념을 멋대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신을 믿는 일은 진정, 새로운 실존의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이해를 요구하는 단어가 아닌, 관계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수준에서는 실존하는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도덕률을 부과할 수 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성적이건, 객관적이거나, 개념적인 어떠한 지식도 적용될 수 없다. 신과 개인의 관계는 특수하고 주관적인 경험일 뿐이다. 현실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선험적으로 그 관계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관계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획득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사이비 과정일 뿐이다. 단지 신앙의 행위만이 실존하는 개인에게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보증해 줄 수 있다."
4. 문제는 자유의 관념적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부정하고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실존의 철학을 구축한 철학자였습니다. 절망은 변증법적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은 실존의 단계에서 용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키르케고르는 44세라는 꽤나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가 절망과 삶의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신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200년도 더 된 그의 이야기는 이제 너무 낡아버렸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면서도 인간은 영원한 것을 바라고,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신처럼'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화해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 아닌, 용기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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