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김 여사의 내적 리듬을 따라 이어나가라는 말밖에 할 수 없네요. 그 내적인 리듬은 자기 스스로 느끼고 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 누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소설 창작의 철저한 개인성이 있는 것이죠. 그 개인성은 개성이라는 말로 바꿀수도 있죠.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는 13년 동안, 모든 창문과 문을 코르크로 막고 세상의 소음이 일체 들리지 않는 밀폐된 방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였지요. 그에게는 자기 작품에 대한 바깥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들이 한갓 소음으로 여겨졌을 뿐이지요. 그는 자기 창작 작업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으려는 듯한 자세로 철저히 개인성을 유지하였지요." - 조성기 <우리시대의 소설가> 중
대학생 때였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는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글 좀 봐줄 수 있냐?" 친구는 문학 동아리에 있었다. 나는 평소 글이란 철저한 개인성을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부탁을 거절하려다, 친구의 글에 호기심이 생겨 알겠다고 대답했다. 친구가 문자 메시지로 블로그 주소를 보내왔다. 나는 인터넷 창에 주소를 쳐 넣고, 친구의 블로그에 들어가 글을 봤다. 친구의 글을 읽다보니 흐름이 조금 바뀌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오타가 난 부분만 골라 댓글을 달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였다. "글은 어때?" 친구가 물었다. "음, 괜찮아." 나는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며칠 뒤,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다른 글도 좀 봐달라는 것이었다. 그 날, 나는 글쓰기에 대한 어쭙잖은 내 생각을 피력하고야 말았다. "음, 이렇게 말해서 미안한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어. 글은 자기가 써서 완성해야 의미가 있지않을까? 네가 말하는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봐 달라는 건 아닐거고, 그렇다고 내가 작품을 비평할만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아무리 유명한 작가가 쓴 좋은 작품이라도 모든 대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잖아. 음... 그러니까 미안. 사실 나는 조금 힘드네. 특히 소설 같이 작가의 자유도가 높은 글을 한 번 봐달라는 부탁이. 미안, 잘 모르겠어.. 친구는 실망스러운 듯,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일까. 조성기 <우리시대의 소설가>에 비슷한 대목이 나오자 나는 회심의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김수옥 여사가 강만우에게 소설 결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묻자, 만우는 여사의 '내적인 리듬'을 따라 개성을 발휘하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자신의 이야기니까 처음과 중간 끝 모두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것아닌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 개성이 언제나 옳다 할 수 있을까? 간절했던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다. 타인이 결코 자신의 글을 대신 써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개성이란 때론 스스로의 철저한 고집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칼빈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며 결국에 화형당한 세르베투스처럼. 자신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잘 팔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만우처럼. 책은 잘 팔리지 않을지언정, 작품 자체는 잘 썼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 "물에 젖은 신문처럼 흐늘흐늘해져, 건져낼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만우의 소설 <염소의 노래>처럼. 글은 스스로 완성해야 하며 그러기 전까지는 타인과 나누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나처럼.
만우씨는 식사를 마친 후, 서재로 들어가 신문들을 펼쳐놓고 연재 소설 부분을 가위로 잘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때 지난 다른 기사들은 건성으로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그쳤지만, 연재 소설은 다시 꼼꼼히 읽어 보며 교정할 부분은 고치고 하면서 화가가 그린 삽화도 살펴보았다. 만우씨는 스크랩을 하다 말고, 지난달 간밤에 비가 왔던 날 아침이 생각났다. 그때 신문이 물에 젖어 광고 부분을 손으로 뜯어내고, 상단부만 모아서 헤어드라이기로 말렸던 것이다. 지금 신문들도, 만우씨가 연재 소설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상단부와 하단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재 소설은 신문의 배꼽 부위에 가로 걸려 있는 셈이었다. 형이상학이 형이하학으로 되는 그 지점에.
만우씨는 문득, 그 사이비 교주가 썼다는 '염소의 배꼽'이 읽고 싶어졌다. 그 책은 만우씨 바로 옆 손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삐이삐이 삐
또 초인종 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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