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 후기: 7편. 타즈매니아 오버랜드 트래킹
도보 여행을 일찍 마치게 된 이유는 멜버른을 떠나며 지원해둔 이력서를 보고 공장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뭐라고, 나와 J는 무척 기뻐했고 일정을 중단하고 휴온빌의 백패커스로 다시 돌아왔다. 휴온빌로 돌아온 다음 날 인터뷰를 보고 나니 결과가 나오기 까지 또 1주일 가량 시간이 비었다. 뭘 할까 하다가, 타즈매니아에 세계 3대 트래킹 코스가 있다고 하여 J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요 며칠 간의 도보 여행으로 걷는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 있을 때였다. 물론, 산에서의 7일간의 트레킹은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다음은 트레킹을 하며 적었던 글들을 바탕으로 적은 트레킹 이야기다.
오버랜드 트래킹 1일차: Lake St. Clar - Narcissus Hut
호바트에서 세인트 클레어 호수 Lake St. Clar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나와 J, 어느 노인과 운전사뿐이었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는 중간에 한 번을 쉬고 계속 달렸다. 길고 곧게 뻗은 나무들과, 노란 꽃을 피운 또 다른 나무들과, 파란 하늘 아래 짙은 남색을 띤 강물, 그것에 씻겨 내려가지 않는 바위를 지났다. 양떼가 들판에서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고갤 들었다.
버스는 만년설이 보이는 외길을 돌아 인포메이션 센터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호바트 도심에서 느꼈던 봄 공기가 아닌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후드티의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야생의 초입에 자리 잡은 인포센터 내부는 아늑했다. 건물은 식당과 호텔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태즈매니아 공원 100주년을 알리는 기념품들 너머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버랜드 트랙을 가려고 하는데요."
"네."
"등록해야 하나요?"
"예. 이 서류를 작성하셔야 합니다. PLB(Personal Location Beacon)는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게 뭐죠?"
"위급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구조요청 장비입니다. 식량은 충분한가요?"
"7일치 있습니다."
"내일모레 비가 아주 많이 올 겁니다. 아시죠?"
"예. 들었는데요. 판초를 쓰고 걸으면 될 거 같습니다."
"눈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정상에는요."
우리는 PLB를 빌렸다. 일주일 대여 비용은 40불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위급한 경우에 처해도 사용하셔도 됩니다만, 실수로 작동됐을 경우에는 바로 꺼주세요."
직원은 PLB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서류를 작성해 남자에게 내밀었다.
"오늘 어디까지 가시나요?" 남자가 물었다.
"나르시서스 헛(Narcisuss Hut)까지 갈 계획입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흘끔 보며 말했다.
"헤드랜턴은 있나요? 지금 가면 해가 질 건데요."
"네."
"어서 가셔야 할 거 같네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나오며 나와 J는 비니를 하나씩 샀다. 캠핑을 할 때면 머리가 침낭 밖으로 나와 시렸었는데, 간밤의 추위와 만년설 부근에 올랐을 때 덮칠 추위로부터 조금은 온기를 지켜줄 것이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길을 나섰다. 이제 막,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여정을 마친 이들이 입구에 모여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찍 떠나야 했다.
7일의 트래킹이 시작됐다. 내가 챙겨 온 물품은 7일 치 식량과 속옷 세 개, 티셔츠 두 개, 바지 두 개, 수건 한 개, 헤드랜턴과 플래시 하나, 판초, 텐트와 침낭, 매트리스, 안대와 귀마개, 칫솔과 카메라, 휴대전화기, 노트와 필통이었다. 텐트는 헛이 가득 찰 경우를 대비한 예비물품이었다. 하루에 얼마나 걸을지 제대로 계획하지 못했는데, 15불을 내고 구매한 트래킹 방수 지도에 자세한 일정이 적혀 있었다. 나르시서스 헛까지는 17.5km였다.
길은 돌과 바위로 이뤄진 길은 특별한 경사가 없는 평지의 연속이었다. 오른쪽으로 세인트 클레어 호수가 보였다. 길 상태가 바뀌기 시작한 건 Myrtle Beech Rainforest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나무에 초록 이끼들이 가득 껴 있는 축축한 지대가 나타났다. 곳곳에 쓰러진 나무들이 즐비했다, 한 아름이 넘는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길을 가로지르고 있기도 했다. 지나며 보는 몇 나무들은 쓰러지려는 듯 미풍에도 끼익 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신발이 바닥에 눌어붙기 시작했다. 맨들한 나뭇가지들을 밟을 때면 발이 미끄러졌다. 곳곳의 작은 시내가 빗물을 머금고 호수로 흘러들어 갔다.
헛에 가는 동안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다는 징조는, 바닥에 잔가지들이 많다는 것, 길에 풀이 무성하다는 것, 더 이상 사람들이 밟고 간 땅의 흔적이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휴대전화의 GPS를 켜 길을 찾았다. 중간에 J와 GPS 보는 방법을 두고 다투었는데, 결국 내가 틀렸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길을 내려고 하거나, 기존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보려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덤불을 헤치고 다시 길로 돌아왔다. 2km를 더 가면 도착이었다.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쓰러진 나무들 때문에 걸음이 더뎠다.
Rainforest가 끝나고 길은 얄틋한 평지로 이어졌다. 길에는 나무 판자들이 줄지어 깔려있었는데, 그곳에서 자라는 식생을 보호하기 위한 공원 측의 조치였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헤드 랜턴을 켜고 걸었다. 얼마 안 가, 나르시서스 헛이 보였다. 헛 안에는 대 여섯 명 되는 이들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의 헤드랜턴은 그들을 재빠르게 훑었다. 나와 그들은 거의 동시에 인사했다. 그들은 불쑥 들이닥친 우리를 환대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여정이었던 그들은 대부분 오늘이 트랙 위에서 마지막 밤이었다.
헛은 스무 명 정도가 잘 수 있는 나무로 된 긴 구조물이 있는 곳이었다. 난롯가에는 두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푸른 빛을 내는 작은 전구가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둘러져 있었다. 저녁 일곱 시 반이었다. 짐을 풀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오버랜드 트래킹 2일차: Narcisuss Hut - Kia Ora Hut
나르시서스 헛에서 버트 니콜스 헛(Bert Nichols Hut)까지 9킬로미터를 걸었다. 4,50미리의 비가 내린다는 강수 예보는 사실이었다. 우림과 돌과 나무, 잔가지가 굵은 식물들이 한 데 섞여 자라는 곳을 지났다. 가끔가다 놀라 날아가는 새 외에 다른 생물체를 보지 못했다. 간밤의 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곳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버트 니콜스 헛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한 시였다. 헛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그곳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다. 점심으로 비스킷과 소시지, 뮤즐리(muesli)를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헛에는 나와 J뿐이었다. 우리는 헛의 옆문을 열고 들어가 2층 침대의 구조물에 바닥에 짐을 풀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남아 지도를 펼쳐 들고, 오후에 근처에 있는 달튼 폭포(D'Alton Falls)에 다녀오기로 했다. 왕복 거리는 8km 정도였다. 그러다 우리는 다음 헛인 키아 오라(Kia Ora)까지 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폭포는 키아 오라에 가는 길에 있었고, 오늘 10km 정도를 더 걸어 키아 오라까지 간 뒤, 다음 날에 오싸 산(Mt. Ossa)을 들렸다 가기로 했다.
풀었던 짐을 다시 배낭 안에 넣었다.. 문을 열고 나오니 하늘은 잿빛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 위로 하얗게 쌓인 눈이 보였다. 빗줄기가 흩날렸다. 우리는 판초를 쓰고 걸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땅은 그 깊은 곳으로 빗물을 계속 밀어 넣었다. 온몸에 습기와 땀이 가득찼다.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허리끈을 단단히 조여 어깨의 통증을 줄여보려 했지만, 걷는 동안 통증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버트 니콜스 헛에서 6km 정도 걸으니 폭포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우리는 배낭을 벗어 쓰러진 나무 아래 뒀다. 갈림길에서 폭포까지는 30분 거리라 지도에 적혀 있었는데, 길을 잘못 보고 비탈길을 내려 간 덕에 10분 만에 폭포에 도착했다. 폭포는 너비가 2,3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그 양끝을 가득 채우며 거세게 떨어지고 있었다
손목시계는 네 시를 가리켰다. 4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배낭을 다시 둘러메니 어깨는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욱신거리었다. 비는 내렸고, 땅을 더욱 질어졌고, 배낭은 계속 무거워졌다. 모든 것이 나를 땅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신발이 최대한 젖지 않도록 했다. 길을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했다. 매번 물이 고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웅덩이가 나오면 근처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뿌리를 밟으며 돌아갔다. 그러나 스치는 나뭇잎과 줄기에 고인 빗물이 후드득 거리며 바지와 신발 위로 쏟아졌다. 고인 물을 피해 걸으면 바지가 흠뻑 젖었고, 식물을 스치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해 걸으면 신발이 흠뻑 젖었다. 몇 번 고민하다 딜레마 사이를 직진하기로 했다. 신발과 바지,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 여지가 없기도 했다. 두 어시간 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어느 남자와 여자가 웅덩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며 걷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 했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다. 아직 2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젖은 바지가 살에 축 달라붙어 있었다. 스치는 가지들에 정강이가 긁혔다. 신발 안에는 물이 차서, 공간을 비집고 발바닥과 마찰음을 냈다.
헛에 도착한 건 저녁 6시가 되어서였다. 헛에는 우리처럼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한 커플과 공사하는 레인저(Ranger)가 있었다. 빗물이 주룩거리며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입구에서 짧은 인사를 하고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헛 안에는 난롯불이 켜져 있었다. 선샤인 코스트(Sunshine Coast)에서 왔다는 커플은 우리에게 난로를 함께 쓰자며 다급히 자리를 내줬다. 그들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자신들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선샤인 코스트에 가보고 싶었다.
옷을 갈아 입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휴대용 가스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물을 부었다. 저녁으로 설렁탕 '맛' 라면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잠 잘 준비를 했다. 평평한 바닥에 누워 수건을 어깨에 대니 경직됐던 근육이 조금씩 풀렸다. 해가 진 8시, 난롯불은 헛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빗방울이 후드득거리며 창가에 떨어졌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오버랜드 트래킹 3일차: Kia Ora Hut- New Pelion Hut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아마 어제 급하게 키아 오라 헛에 오는 길에 빠뜨렸나 보다. 해가 진 저녁 무렵, 헛에 오기 전 GPS를 확인한 다음부터 휴대전화의 행방을 알 수 없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걸 안 건, 아침 8시 헛을 나서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뒤였다. 간밤에 책상에 올려뒀던 기억이 나서 헛까지 다시 돌아갔지만, 없었다. 어제 오는 길에 빠뜨린 게 맞는 것 같았다. 헛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레인저 롭(Rob)에게 이야기하니 내려가서 인포메이션 센터에 신고해 두라고 말했다. 휴대전화를 잃고, 그렇게 그곳에 담긴 기억과 추억을 함께 잃었다. 기억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역할을 나는 왜 모조리 휴대전화에 맡겼나 싶었다.
다시 뉴 펠리온 헛(New Pelion Hut)을 향해 걸었다. J는 예정대로라면 오싸 산에 오르고 있을 것이다. 이틀 사이에 꽤 올라왔는지 알파인(alpine) 지대가 나왔다. 하늘은 푸르렀다. 구름은 산 중턱에 걸려 있었다. 기괴하게 갈라진 바위 위로 푸르고 푹신한 이끼가 껴 있었다. 잎 없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과 그것들의 틈을 메운 적막함 속에서 걸었다.
오싸 산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날 때, 누군가 날 불렀다. J였다. 산 어디에선가 내려오는 길인 것 같았다. 갈림길에 신을 벗고 앉았다. 간밤에 젖었던 신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여기까지 오는 길에 다시 젖었다. J는 휴대전화를 찾았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나는 정상에 갔냐고 물었다. 그는 정상 부근까지 갔으나 눈과 안개가 많이 싸여 더 올라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J도 갈림길에 앉아 신을 벗었다. 오늘 가야 할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늘의 구름이 나선형으로 돌며 흩어지고 있었다.
헛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한 시쯤이었다. 텅 비었던 헛은 이내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주의 어느 학교에서 왔다는 열댓 명의 학생들과 브리즈번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들, 우리와 같은 여행자들을 포함해 스무 명 정도였다. 점심을 먹고 햇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클리 산(Mt. Oakleigh)이 햇살을 등지고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길고 긴 휴식을 취할 태세로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물을 뜨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헛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읽었다. 안내문은 오클리 산 정상이 세계에서 꼽는 경관을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꼽는 경관이라.' 나는 J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J는 신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채, 햇살을 맞으며 글을 적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J가 어서 가자며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오후 네 시였다. 여섯 시쯤 해가 질 테니, 노을을 보고 여덟 시쯤 돌아 올 계획이었다. 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우리는 채비를 갖추고 헛을 나왔다. 오클리 산으로 가는 길은 이제껏 지나온 길과 같이 빗물이 고여 질척이는 구간이 많았다, 사람들이 잘 걷지 않는지, 길에는 크고 작은 나무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정상에 오를수록 경사가 가팔라졌다. 우리는 노을을 보기 위해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올라 해 지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었다. 우리는 뛰다시피 걸었다. 오클리 정상에 오르는 여정은 정상에 오르는 수단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다. 우리는 두 시간 거리인 정상에 한 시간 만에 올라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새 구름이 껴 해가 자취를 감췄다. 노을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사진 몇 장을 기념으로 남기고 하산해야 했다. 문득 우리가 만약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여정은 어땠을까 싶었다.
내려오는 길에 길을 잃었다. 어디로 올라왔는지 전혀 기억나지가 않았다. 잔가지 밟히는 소리가 태양 빛을 잃어가는 숲 속에 울려 퍼졌다. GPS가 가리키는 길에는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느낌을 따라 걸어야 했다. 조금 돌아가는 것 같더라도, 사람들이 지났을 법한 길을 찾아 걸어야 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길을 알리는 오래된 강통과 형광 띠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헛으로 돌아 온 시각은 여덟 시였다. 헛의 문 앞에서 비니를 쓴 한 남자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헛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헛의 사람들은, 나를 왜 신경 쓰는가. 아니, 이곳은 서로가 신경이 쓰이는 구조였다. 서로가 서로를 향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름모를 타인의 없음이 걱정되고 있음에 마음이 놓이는 환경이었다. 나는 '걱정해줘서 고맙다, 말 못하고 나가서 미안하다'고 하며 헛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로 가득 찬 헛은 크고 작은 인기척으로 활기가 넘쳤다. 모두가 잘 있는 거 같았다. 선샤인코스트에서 온 커플이 우리를 보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버랜드 트래킹 4일차: New Pelion Hut- Windermere Hut
아침 날씨는 흐렸다. 간밤에 워터폴 밸리(Waterfall Valley)에서 25여km를 하루만에 걸어 왔다던 시드니에서 온 남자는 이미 짐을 꾸려 떠났다. 오전 여섯 시. 창 밖으로 해뜨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풍경이 비쳤다. 창문을 열었다. 바깥과 내부의 온도가 어느 정도 평형을 이루었는지, 밀려드는 아침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으로 오트밀과 무즐리를 먹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윈더미어 헛(Windermere Hut)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간밤에 널어둔 빨래는 축축했다. 식량은 조금씩 줄었지만, 배낭은 어깨와 허리를 여전히 짓눌렀다. 비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땅 위에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판초를 뒤집어 쓰고 헛을 나섰다.
이 여정 위에 커다란 의미는 없었다. 여정은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그러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발을 내디딜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걷는 것이 곧 여정의 의미였다.
빗줄기는 점차 거세졌다. 판초 안으로도 빗물이 스며들었다. 푸른 이끼가 가득한 우림을 지나 황량한 벌판이 펼쳐지는 알파인 지대를 지났다. 하늘에서 흩날려 오는 빗줄기는 바람을 타고 왼뺨을 때렸다. 알파인 지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점심으로 비스킷을 먹었다. 몸이 떨렸다.
윈더미어 헛에 도착하니 북쪽에서 남쪽으로 걷는 또 다른 일행들과, 우리보다 30분 먼저 떠난 선샤인 코스트에서 온 커플이 있었다. 최대 인원이 16명이라는 헛은 이미 가득 차 보였다. 창문에는 김이 서려있었고,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창틀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벗어 놓은 젖은 외투와 신발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난롯가가 보였다.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2층 침대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전과 비슷한 구조였다. 몇은 침낭을 펴고 자고 있었고, 몇은 물을 끓이며 점심을 먹을 준비를 하거나, 책을 보거나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저녁 여덟시, 비상쉼터인 키친 헛(Kitchen Hut)에서 하루를 묵고 왔다는 일행들이 왔다. 모두 다섯인 그들이 헛에 들어오자 헛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창조되었다. 환대와 경계의 표현으로 먼저 온 자들은 나중에 온 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헛에 들어온 이들은 그곳에 빈자리를 찾아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려 했다.
그들은 싱가포르에서 왔다고 했다. 그들은 오버랜드 트랙이 아닌 페이스 트랙(Face Track)을 ‘실수’로 타서 키친 헛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고 했다. 그의 말은 모두를 안심시켰던 거 같다. 그들이 겪었을 고생을 짐작하는 이해의 지평은 그들을 향한 환대의 정도를 결정했다. 우리는 난롯가에 자리를 조금 내주었고, 그들은 옷과 신을 벗어 빈 공간에 두었다.
헛은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누가 들어올지 예상할 수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만남을 관찰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장소였다. 각자가 각자를 침해하지 않는 거리를 두고 헛의 평화는 유지되었던 것 같다. 서로를 너무 깊게 알아가지 않는 것이 단기적 공존에는 편리했다. 그저, 함께 어느 유희를 공유하는 것, 서로의 내면을 자극하지 않음으로-가치관 따위를 묻는 우를 범하지 않음으로- 서로에게서 마음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일 뿐더러 지속되는 여정으로 피로하기에- 서로를 경계의 대상으로 환대하는 것, 환대의 대상으로 경계하는 것이 헛에서 이뤄지는 공존의 모습이었다.
7일의 여정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질 준비가 된 곳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담으려는 노력으로 배낭을 꾸려 트랙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 휴대전화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곳에서, 저녁의 공백-어느 권태와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대상이 타인이며, 생존과 낭만 그 사이에서 별다르게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이 없는 곳에서, 젖은 옷과 신발을 말리고,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단지 내일정도를 생각하며 지도를 펴고 가야 할 길을 되짚어 보고 잠자리에 드는 곳에서, 환대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일이었다.
오버랜드 트래킹 5일차: Widermere - Waterfall Valley
난로는 고장이었다. 바깥으로는 눈이 조금씩 내렸다. 체온과 실내의 온도 차이에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가스 스토브를 꺼내 불을 붙였다. 냄비의 손잡이 코팅이 벗겨져 있었다. 껍질처럼 벗겨진 코팅을 떼어내고 물을 부었다. 물이 끓는 동안 컵을 씻고 커피 가루를 털어 넣었다. 커피를 마시는 김에 아침을 먹기로 했다. 비스킷과 소시지를 함께 먹었다. 후추가 뿌려진 비스킷과 햄은 밖에 나가서 사 먹을 만큼 맛있었다. 커피는 씁쓸하며 따뜻했다.
아침 해가 창가로 비쳤다. 벗어둔 젖은 신발에서 김이 올라왔다. 사람들로 붐비던 헛을 나와 채 마르지 않은 옷들을 비닐봉지에 말아 넣었다.
윈더미어 헛에서 워터폴 벨리 헛 까지 가는 길은 얕은 내리막이었다. 간밤에 눈이 내려 길은 아름답고 미끄러웠다. 흰 눈이 사방을 덮은 풍경은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은 7.5킬로미터를 가면 되는 비교적 짧은 여정이었다.
워터폴 밸리까지 걷는 길에 자꾸만 나는 왜 이 길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어딘가에서 나를 엄습했다. 그러나 나는 답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 길을 지나, 또 다른 어느 길에 있을 나를 상상했다. 그때도 '왜'라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불확실함과 모호함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으로 대답할 수 있었으면 했다. 워터폴 밸리 헛이 눈 앞에 보였다. 여정의 마지막 헛이었다.
오버랜드 트래킹 6일차: Waterfall Valley - Cradle Mountain - 하산
실내 온도계는 2도를 가리켰다. 간밤 추위에 뒤척이던 나는 부리나케 난롯가로 갔다. 난로가 꺼진 지 8시간이 지났다. 난로는 45분마다 가스 공급이 끊겼고, 그때마다 재점화해야 했다. 퓨즈가 고장 난 난로를 켜기 위해서는 최소 둘이어야 했다. 한 명이 스위치를 돌리고 다른 한 명이 퓨즈에 성냥이나 라이터 불을 붙여야만 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헛(hut)을 나왔다. 서서히 해가 뜨고 있었다. 간밤에 깨어 밖으로 나갔을 때 봤던 별과 달이 사라진 곳에는 텅 빈 하늘만 있었다. 커피를 마실 물을 뜨려했는데, 워터 탱크의 수도꼭지가 얼어 붙어 있었다. 실외 온도계는 영하 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헛에 돌아왔다. 다행히도 어제 쓰다 남은 물이 냄비에 조금 남아 있었다.
인기척에 사람들이 하나 둘 깨기 시작했다. 그중 키가 크고 50대 후반으로 보이던, 자신의 트레킹 장비를 열정적으로 소개하던, 이번 여정에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로를 향해 웃었다.
난롯불이 다시 타올랐다. J가 바깥으로 나가 채 얼어붙지 않은 시냇물을 떠 왔다. 필터로 물을 한 번 걸은 다음 냄비에 붓고 끓였다. 아침으로는 오트밀을 먹었다. 7일치의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널어둔 양말과 신발, 수건과 옷이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 물론, 전날 밤보다는 물기는 말랐지만, 냄새는 더했다.
더 늦기 전에 떠나야했다. 배낭을 메고 간밤 헛에서 하루를 보낸 이들과 인사했다. 그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우리가 걸어 왔던 길을 반대로 걸어 간다. 그간 여정을 함께 했던 선샤인 코스트에서 온 커플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여행을 마치고 따뜻한 선샤인 코스트로 돌아갈까.
서리와 눈으로 뒤덮인 바깥은 하얬다. 길을 가르며 흐르던 작은 물길이 얼어붙어 있어, 허벅지를 평소보다 높이 들고 걸었다.
크래들 마운틴(Cradle Mountain)으로 가기 위한 갈림길에 도착한 건 10시쯤이었다. 날은 추웠지만 맑았다. 해가 떠올라 지면을 데우자 얼었던 빗물이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다. 풀숲에 맺혔던 서리가 물방울이 되어 땅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길 아래로 비상 쉼터인 키친 헛(Kitchen Hut)이 보였다. 우리는 키친 헛에 가는 대신 갈림길 작은 나무 뒤편에 배낭을 벗어두고 산에 오르기로 했다. 바닥에 판초를 깔고, 내 배낭을 놓고, 그 위에 J의 배낭을 얹고, 판초를 덮고, 돌을 올렸다. 카메라와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챙겨 크래들 마운틴에 올랐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발목이 약간 꺾일 정도의 경사이던 길은 오르막 정상 부근에 이르러 험한 바윗길로 변했다. 흰 눈으로 덮인 바윗길에는 쇠로 된 푯대가 4,5미터마다 꽂혀 있었다. 일종의 이정표였다.
바위는 높고 미끄러웠다. 바람이 불 때면 몸이 흔들렸다. 오르는 높이만큼, 지상의 것들은 멀어져 갔고, 나는 그곳의 어느 작은 바위의 일부가 되어 지상에서 잊히는 것 같았다. 바윗 고개를 넘자 길은 건너편 바윗길로 넘어가는 눈 덮인 산의 능선이 나타났다. 미끄러지다시피 바위를 내려와 능선을 걸었다. 그곳을 먼저 걸었던 이들의 발자국이 하나의 길이 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새하얀 눈은 햇빛을 받아 번뜩였고, 강한 햇빛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대로 멈춰서 있다간 시력을 잃을 것 같았다. 능선의 끝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면 정상'이라고 말했다.
정상은 광활하며, 아름다웠고, 두려웠다. 흰 눈에 둘러 쌓인 검은 바위들은 이미 무너져 내린 돌무덤 위로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거 같았다.
강렬한 여운은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에도 가시지 않았건만, 배낭을 덮어둔 판초를 들추는 순간 허탈하고 황당했다. 배낭 주변으로 작은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축축한 이끼가 낀 땅 위로 배낭이 파헤쳐져 있었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쓰레기 봉투까지 헤집으며 배낭을 뒤졌을까. 식량이 부족했던 걸까. 그래도 그렇지. 산에 오르며 마주친 일행 몇을 떠올렸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도 음식을 제외한 물품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제 더는 식량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배낭을 멨다. 다시 걸었다.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인사를 나누는 게 점차 힘들었다. 몇은 먼저 인사를 건네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제는 나도 그들을 가만히 지나쳐갈 수 밖에 없었다. 지형이 바뀌며 서로를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었다. 오버랜드 트랙을 걸으면서 가능했던 서로를 향한 자연스런 환대는 점차 어색한 것이 되어갔다.
공터에 즐비한 자동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배낭을 둘러메고, 건물로 들어가거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7일만에 딛는 아스팔트가 사뭇 새로웠다. 우리는 정류장에 앞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눈 앞에서 지나간 셔틀버스가 다시 오기까지는 삼 십 분을 기다려야 했다.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몰려와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마리가 주위를 배회하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퍼덕이며 날아와 옆에 놓인 종이컵을 물어갔다. 나는 문득, '배낭을 길 위에 벗어두면 까마귀들이 날아와 지퍼를 열고 음식과 반짝이는 물건들을 훔쳐가기도 한다'는 문구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범인은 까마귀들이었던 걸까.
하늘에서 조금씩 비가 내렸다. 까마귀 떼가 일제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까마귀 떼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침의 텅 빈 하늘이 나타났다. 돌아올 수 있는 여정이라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축복받은 순간들일 것이다.
벗어둔 배낭을 둘러메고, 느슨해진 어깨끈을 다시 조였다. 트랙 위에서 느꼈던 배낭의 무게를, 벌써 잊혀지기 시작하는 어느 마음의 상태를 기억해 보려 했다. 보이지 않는 길의 끝에서 셔틀 버스의 엔진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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