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 ⏐ 56 ⏐ 일상 에세이

2022. 9. 14. 11:40·기록/일상 에세이

흑백 사진을 좋아했다. 색상에 반응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피사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풍경이든. 흑백에 담긴 세계는 흥미로웠다. 그럴리 없었겠지만 세상이란 것을 조금 더 제대로 보는 느낌이었고,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듯 했다. 카메라를 하나 들고 발길 닿는 대로 걷기를 좋아했던 나는 남들이 다 아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힙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후미진 골목과 인기척 없는 뒷산에 오르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온 날에는 수 십 장의 고요한 흑백 사진이 메모리 카드에 가득 차 있었다.

 

흑백 사진을 찍으면서 알게 된 건 검정은 단순한 검정이 아니고, 하양은 단순한 하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고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완전한 검정과 하양, 완전한 어둠과 빛은 적어도 사진에는 온전하게 담을 수 없었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사진은 언제나 완전한 흑과 완전한 백 사이의 '불완전한' 무엇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회색이나 옅은 회색 정도 말고는 그 사이의 색을 일컫는 이름이 없어 0과 255 사이의 rgb(157,157,157)과 같이 표현해야 하는 색들이 그곳에 온전하게 존재했다.

 

매일 같이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던 그 때의 나는 성공과 실패,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관념 사이에서 삶이 딛고 설 자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내 색은 rgb(230,230,230) 정도였지 싶은데 (참고로 0은 검정을 255는 하양을 의미한다) 그 때의 나는 남들과 같이 다채로운 팔레트 위에서 내 색을 찾으려 했다. 그 때의 나는 나를 잘 몰랐었고 그리하여 좌표를 찾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 번은 사진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다. 강사님은 내가 담는 피사체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주제 의식을 갖고 그것을 엮어 내는 것이 사진 작가의 역할이라고 했지만, 그 정도까지의 역량은 되지 않아 취미 생활 수준으로 사진을 담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별 생각 없이 거리를 걸으며 찍은 당시의 내 사진은 아침 햇살, 골목길, 누군가의 뒷모습, 길고양이 정도로 요약됐다. 햇살이 비치는 어느 아침, 인적드문 골목길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걸어가고 있고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아마 내가 찍었던 사진 중 하나와 비슷한 풍경일 것이다.

 

내 인생의 색깔은 앞으로도 눈길을 끄는 색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올해의 컬러, 이달의 컬러, 오늘의 컬러와 같이 유행이나 시류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아서다. 밤 하늘의 별은 단순한 몇 가지 색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담담하고 푸르게 빛나는 별이 가득한 밤 같은 순간을 꿈꾼다. 앞으로의 시간들이 흑과 백 사이의 무수한 색을 발견해가는 더 많은 시도로 가득찼으면 좋겠다. 당장에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화려한 색상으로 눈길을 재촉하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다른 눈으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무수한 흑과 백들의 경계를 짚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래는 오랜만에 찾아본 그 때 그 시절의 사진.

 

Seou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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