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 대한 담론이 이토록 뜨거웠던 시대가 있었을까. 도처에서 청춘을 위로하는 문장과 동시에 청춘의 당위를 부추기는 명령들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나날이다.
그러한 담론 사이에서 백수는 애매한 존재다. 시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청춘이기는한데 아직까지 별 쓸모는 없는 존재라 이걸 위로해야 할지, 조금 더 열심히 하라 해야 할지 잘 감이 안서는 존재랄까.
사실 백수에게는 뭐든 좋다. 백수란 그러한 담론으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는, 또한 스스로가 그러한 담론으로부터 자신을 배제하는 자존감이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백수로 자신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거의 없다 시피하다. 책에서도 백수로 살아남는 방법을 이야기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거리는 기존의 백수가 아닌 새로운 백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백수의 새로운 정의
그러니 이쯤에서 백수를 새롭게 정의해야 할 거 같다. 책은 백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백수는 직업이 없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경제활동을 주도하는 존재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는 드물다. 뭐든 한다. 다만 정규직에 매이거나 어떤 고정된 장소에 출퇴근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필요할 땐 직업을 갖지만, 쉬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둔다. 프런티어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고미숙 저
이 얼마나 그럴싸한 말인가. 하지만 이를 뜻하는 현실적인 단어가 있으니 바로 프리랜서다. 백수의 장점으로 저런 이야기를 하면 어딘가 그럴싸 해보이지만, 프리랜서라 하면 이제 누구나 아는 그들의 고달픈 현실일 따름이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헌신해 정규직원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가 뭘까. 이러한 무한한 자유의 대가가 곧 불안과 스트레스 뿐만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연암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
내가 이 책을 예찬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저자는 백수의 롤모델로 연암 박지원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읽는 내내 너무도 불편했다. 저자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3대 성인 다음에 연암을 끼워 넣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관직을 멀리하고 책을 읽고, 벗을 사귀며, 삶을 향유했던 그의 삶은 충분히 본받을만 하지만 그가 그런 삶을 영위하며 겪었을 고단함에 대해서는 '쿨하고 멋진 삶의 표본'이라는 타자의 시선으로 퉁 치고 만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솔직히 기만적이다. 백수라는 청년들을 타겟팅 하여 '백수로 살아남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괜찮다, 한 걸음 네 길을 따라 걸어보라. 공동체를 꾸리고, 관계를 추구하고, 책을 읽고, 배우며, 글을 써보라. 하는 삶의 모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좀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그렇게 이 책 또한 기승전 '노력'이지만, 별 수 있는가.
현실을 파악하자
중요한 돈 얘기를 안했다. 많은 이들이 바라는 건 단지 백수의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돈 많은 백수다. 그러니 삶의 질을 위한 돈과 시간의 적절한 밸런스가 아닌, 둘 중 하나만에 전념하는 우를 범하진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관계나 지식이나 학문이 전부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번듯한 직장에 탄탄한 정규직으로 입사하면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또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백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해도 무조건 불행하기만 한 것도, 또 무조건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직장인에게는 백수와 같이 유유자적하는 공백의 시간이 필요하고, 백수에게는 삶을 이어갈 수 있게하는 일거리와 관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균형을 '워라밸'이라는 단어로 한 번 유행시킨 적이 있지 않았던가.
백수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고, 백수로서 채워가야 할 부분들을 채워가야 한다.
당당하자 백수여
그럼에도 이 책은 일하지 않으면, 취업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청춘이며, 또한 실패한 청춘이라는 이분법을 타파하려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누가 아는가. 취업과 백수 사이, 그 어느 좁디 좁은 길이 그대의 길일지. 그리고 그 길을 백수의 시간을 통해 그 길을 찾을 수 있게 될지. 그러니 당당하자 백수여. 그리고 쫄지말자.
우리 시대 청년들이 우울한 건 단지 백수라서가 아니다. 백수라는 상황에 지레 겁을 먹고 자신을 꽁꽁 가두어버린 탓이다. 진솔하게 자신을 내보이지도 못하고 타자와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다. 한편으론 세상을 두려워하고, 한편으론 세상을 경멸한다. 노동의 소외, 화폐의 망상이 만들어낸 질곡이다. 프런티어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고미숙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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