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변하지 않을 수 없다면 변화의 기준점이라도 스스로가 세워갈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 전에 그러한 기준점을 형성하는 사회 환경에 대해 먼저 고찰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함께 공유하는 또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면, '자유 의지'를 발휘해 이룩해 낸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일 것입니다. 능력주의는 많은 면에서 유용합니다. 능력이 있는 이들은 좋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능력에는 절대적인 부분과 동시에 상대적인 부분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국의 젊은 청년들은 절대적인 능력은 그 어느 세대보다 뛰어나지만, 동시에 같은 세대 내에서는 거의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를 한 사회로 확장해 봅시다. 능력주의는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유지시키는 데는 여전히 유용해 보이지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됩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라는 게 현대 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 관점이죠.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잠깐 들어보죠.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 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중
그렇기에 한편으로 능력주의는 가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군가가 단지 조금 못하거나 돈이 조금 없다면, 그건 그냥 그런 게 아니라 열등한 것이고,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주의가 표방하는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오늘날엔 똑똑하고 돈 많은 이들이 가장 많은 능력자라고 여기죠. 하지만, 고대 스파르타나 12세기 유럽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안전이 문제가 될 때는 용기 있는 투사나 말을 탄 기사가 존경을 받는다. 재빠른 동물의 고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는 공동체에게는(아마존 지역) 재규어를 죽이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더불어 그 상징인 아르마딜로 허리띠를 얻는다. 교역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기업가와 과학자가 존경의 대상이 된다(현대의 구미 지역).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
능력주의를 이야기 하며 뭔가 투정을 부리고 싶은 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능력주의는 상당히 유용한 면이 많고, 또 실제로 꽤나 정직한 것이기까지 합니다. 많은 돈을 버는 이들은 그만큼 꾸준한 노력하며 기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부의 상속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그건 그 이전 세대 부모나 조부모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불법과 부정, 친일 등의 행위로 부를 쌓은 경우는 능력주의라기 보다는 기회주의라 해야 하겠지만, 여기서 더 깊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군가의 능력이란 결국 자본을 통한 외적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입는 옷, 먹는 음식, 인스타에 올리는 사진, 타고 다니는 차, 심지어 걸음걸이, 말투와 행동 등이 한 개인의 능력, 즉 위치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과 욕망의 중심에는 '소비'라는 행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단지 누군가보다 더 나은 무엇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월감을 주기도 하지만, 소비는 그 자체로 만족을 가져다 주며, 어느 정도 불안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들은 많은 제품들을 필수품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필수품을 구매한 소비자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죠. 또한 이를 소비하고 소유할 때 특별한 능력과 자격을 얻은 것처럼 되어서, 정말이지 전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능력주의와 소비주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견고하게 지지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알랭드 보통은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안을 치유하고 평안해 질 수 없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
방법은 없는 걸까요. 이 부분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기에는 벅찬 부분이니 말입니다. 알랭 드 보통은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는 간략히 한 문단만 인용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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