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방인>의 뫼르소를 동경했다. 온전한 존재로 거듭난 그가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다는 카뮈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읽었다. 선생님은 감옥에 있으며 신문지 크기 만한 햇살 때문에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유일한 행복은 오로지 그 햇빛이었다며, 햇빛 때문에 아랍인들을 죽인 뫼르소를 언급했다.
선생님이 이야기 하는 중심에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란, 내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사회와 맺는 관계,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이되 고립되지 않고 관계들 속에 존재한다. 소설 속 뫼르소가 고독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극히 주체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절대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상대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세계에는 뫼르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관계 담론을 인식의 문제, 사람의 문제로 논의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관계는 세계의 본질입니다. 세계는 관계입니다. 세계는 불변의 객관적 존재가 아닙닌다. 그것이 양자 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는 세계상입니다. 세계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뉴턴 시대의 세계관입니다. 입자와 같은 불변의 궁극적 물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고 파동이면서 꿈틀대는 에너지의 끈이기도 합니다. 끈이 아니라 막membrane이기도 합니다. 불변의 존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존재는 가능성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관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펼치는 접속도 이러한 세계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기계라는 중립적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합니다. 대상은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주체와 대상 역시 관계를 통해 통일됩니다. 관계는 존재의 기본 형식입니다. - 신영복 <담론> 중
관계가 없다면, 실존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참 의미를 갖는다. 뫼르소는 시지프를 떠올리게 한다. 시지프의 삶은 허무하다. 그가 끝없이, 산 정상으로 돌을 밀어 올리고, 다시 굴러 떨어진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관계-의미로부터 박탈되어 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존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인간은 이미 기투된 다른 인간들 사이로 기투되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하는 탈근대의 과제,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의 전환은 절대성을 가능케 하는 상대성을 향한 인식과 이해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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