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 후기: 1편. 내가 호주로 떠난 이유
텅 빈 자기소개서란에서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다. 뭐라도 좀 써보라는 거 같은데, 난 쓸 말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쓰고 버텨보자니 인생이 별안간 허공에 붕 떠버린다. 대학을 졸업했으니 이제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같이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는 놈을 받아줄 얼간이 같은 회사는 아마 없을 터였다. 그래도 날마다 가슴에 담이 하나씩 쌓이는 듯한 압박감을 어쩔 수가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들겨 보지만, 결국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들이었다.
뭘 하고 싶은데?라는 질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꼭 뭘 해야하나? 나 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대놓고 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는 문장이로구만? 따위의 생각에 이르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선 웃음이 픽 나왔다. 그렇게 이 문장을 걷어 차 버리고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렸다. 깜빡 거리는 모니터 커서를 보고 있는 대신, 침대에 누워서 눈을 깜빡거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아뿔싸, 내 젊음은 결국 이렇게 흘러가 버릴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언젠가 죽게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보니 뭘 하지?라는 질문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으로 바뀌었다. 내 대답은 여행이었다. 이후 질문과 대답은 구체적으로 변했다. 여행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 없이 여행 떠나는 법?은 없으니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했다.
부모님께 그런 결심을 말씀드렸더니 어째 시큰둥하셨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영국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일까. 이번에도 잘 생존해서 돌아오리라 생각하셨나 보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게도 그리 큰 일은 아니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영어 실력은 영국 특유의 발음인 워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그때보다는 나았으니 말이다.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여러 블로그와 카페를 들락날락 해본 결과 워킹홀리데이와 '성공'이란 단어가 눈에 밟혔다. 그런 평가들에 넌덜머리가 나서 다들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하면 받게 되는 비자는 1년짜리 외국인 노동자 비자인데 그 기간 동안에 성공을 하면 얼마나 성공할 수 있다는 걸까? 또, 성공이라 하면 오지잡을 구하는 걸까?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걸까? 돈을 많이 버는 걸까? 영주권을 따는 걸까?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그건 각자가 워홀을 통해 목표를 이룬 것이지, 그걸 또 워킹홀리데이의 성공이라 정의하는 건 뭔가 싶었다.
떠나기 며칠 전, 지인들과 저녁을 먹었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오를 무렵, 돌직구를 던지기로 유명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화기애애했던 응원의 분위기를 깨고 투수가 등판하는 순간이었다.
"오빠, 근데 또 가요? 여행이요? 풉. 현실 도피 아니에요?"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강력한 초구였다.
"응, 또 가. 근데 그게 여행이잖아. 이래라 저래라 하는 현실을 도피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는 거." 원 스트라이크에 구멍이 뚫려버린 가슴 한구석을 애써 매만지며 내가 말했다.
"에휴, 눈에 선하다, 선해. 가서 또 접시 닦을거 아니에요." 투 스트라이크인 걸까?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버렸다.
"야! 이번에는 접시 안 닦을거야." 나는 정말로 접시는 닦지 않으리라 그 자리에서 다짐하며 말했다.
"하하, 여튼 재밌게 보내고 와요. 짠!" 그대로 아웃이 되나 싶었는데, 안쓰러웠는지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났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는 날, 그런 생각을 했다. '목표가 분명하다면야 성공과 실패의 척도도 명확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경험이 목표라면, 실패도 성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로부터 자유로운 여행을 하자.' 누군가에게는 철저한 자기 합리화로 보였겠지만, 그게 어떻든 상관없었다. 당시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고, 중요한 건 그 생각을 시도해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3백만 원을 들고 나는 호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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