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 후기: 2편. 브리즈번을 지나 어느 산골 마을로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곳은 브리즈번이었다. 한국에서 미리 연락을 해뒀던 에어비엔비에 찾아갔다. 시내의 한 카페에서 일하는 동유럽 출신 여자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바깥 날씨는 조금 무더웠고, 방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지만 방 규모에 비해 꽤나 큰 선풍기 한대로 그럭저럭 지낼만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피터와 이메일을 주고 받고 있었다. 피터는 어느 산골 마을에 있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다. 갑자기 왠 산골 마을에 공동체냐 싶겠지만, 그곳에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대안 공동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서 떠나오기 전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였다. 마을은 브리즈번에서 몇 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기독교 공동체가 있는 곳이었는데, 어떤 곳일까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은 워홀러에게 숙식을 제공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성서의 구절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해야 했다.
마을로 떠나는 날, 분주하게 짐을 챙겨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도심을 빠져나간 버스 차창에 허한 벌판과 푸른 하늘만이 가득 차기를 몇 시간 뒤, 나는 터미널 앞 텅 빈 주차장에 배낭을 메고 서 있었다. 그런데 정작 데리러 온다는 이의 연락처는 알지 못하는 터였고, 그저 며칠 전에 그곳에 몇 시 버스를 타고 도착할 예정이다는 이메일을 보내고 알겠다는 답장을 주고받은 게 다였다. 문제는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외딴곳에서 어떻게 하루를 보낸단 말인가? 그런 우려를 가득 안고 터미널 외벽에 기대 멍하니 해지는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데, 붉게 물든 아스팔트를 힘차게 짓밟으며 달려오는 차 한 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그는 동양인인 나를 한 번에 알아보았고,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아름다운 해질녘의 순간을 예찬하며 차에 올랐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끄자 주위가 어둠에 묻혔고, 플래시를 켠 그는 자신을 따라 오라고 했다. 그와 함께 걸어간 곳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저녁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별이 총총 뜬 밤, 둥그렇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배를 마치고서는 한 노부부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한 달간 함께 지낼 나의 호스트였다. 호스트가 안내해 준 방은 작지만 아늑했다. 그러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작은 편지와 함께 다과를 건네던 주름진 손길에, 다시는 떠올릴 일이 없을 거 같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의 일과는 그랬다. 아침 해가 뜨면, 각자 머무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일터로 걸어 나간다. 점심 시간이 찾아오면 큰 홀에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잠시 티 타임을 갖는다. 다시 일터로 갔다가, 오후 휴식 시간이 찾아오면 커피나 음료 한잔씩 들고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눈다. 해질 무렵이면 일을 마무리하고, 서로의 집에 방문해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곤 했다. 단조로운 일상이었지만, 단단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은 없었다. 저녁이면 소음 없는 침묵의 시간이 찾오곤 했고, 도시의 소란스러운 밤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는 며칠이 지나도 그 사실이 몹시 이질적이었다. 21세기, 호주에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니!
이곳 구성원들을 살펴보자면 반은 여생의 끝에 접어든 나이 든 이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가진 중년의 부부들이었다. 그들은 '손에 흙을 묻히는 이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곤 했고, 여자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다녔다. 음식은 자급자족했다. 공동체에 일정한 규칙과 규범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화와 조율을 통해 꾸려져 나가는 거 같았다. 그런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자신들만의 평화 속에 은둔해 사는 것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를 위해 얼마나 큰 결심과 고민과 실천이 필요한지 생각해보게 되면, 공동체원들에게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누구나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대안으로 이토록 실천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며칠을 더 머물며 보니,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에서 오는 평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는 삶의 문장들은 평화롭고, 행복하다, 더할 나위없다가 아니라, 때로는 권태롭기도 하고,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기도 하며,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는,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면 장소를 불문하고 마주하게 되는 일상의 질문들이었다.
체류한 지 일주일 쯤 됐을까. 하프와 드럼, 기타가 어우러진 밴드 연습에 구경을 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밤이었다. 깜깜한 밤이었고, 달빛에 의지해 홀로 산길을 걷고 있었다. 본래 어두운 밤을 유독 무서워하곤 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밤이 숭고하다는 생각을 했다.적막과 고요 속에서 흙길을 밟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신과 사랑은 동의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것들은 무한하며 영원했고, 영원하며 무한했다. 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는 곧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이며, 신에게 삶을 헌신하는 이들은 곧 자신의 삶의 순간 속에서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삶을 바치겠다는 신자의 고백은 사랑하기를 결심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내가 선 곳이 나의 생각을 결정한다는 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이 결국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평생을 보내도 좋을 거 같았던 공동체 생활은 생각보다 일찍 막을 내렸다. 내가 했던 일은 농사일을 돕는 것이었는데, 일이 생각보다 고됐거니와 점차 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나가서 이 일을 하면 시간당 20불은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며 이를 하나의 삶의 태도로 이어나갈 깊은 내공이 내게는 없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용기 없고, 참을성 없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 달 간의 약속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떠남을 예고했다. 꽤나 갑작스러운 통보에 그들은 당황해했고, 나는 그저 미안하다 말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시드니로 가는 버스표를 쥐고 떠나오는 날. 그들은 가는 길에 먹을 음식과 함께 축복이 담긴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차를 얻어 타고 다시 터미널로 오게 되었을 때쯤에야, 이제 기존에 속했던 공동체로 돌아가 기존의 법칙에 따라, 또 다시 새롭게 나의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생존 경쟁으로 가득 찬 워킹홀리데이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후기: 1편. 내가 호주로 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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