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면서 시험 삼아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나, 믿고 단호하게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나, 그 운명은 똑같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부서 이동을 한 번 더 할 거 같아요. 지금 있는 곳은 본사의 자회사였는데 2개월 정도 일을 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회의 때 매니저가 갑작스레 ‘몇 분은 부서 이동을 해야하고, 몇 분은 안타깝지만 더는 함께갈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새롭게 조직 개편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곳은 최근에 팀 빌딩을 시작한 곳이고 몇 가지 시도를 했지만 성과가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 전 그 이유가 애초부터 잘못된 사업 모델과 운영 방식에 있다고 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구조 조정을 하더라고요. 매니저는 제게 ‘본사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웃음이 나왔어요. 왜 내 의사는 묻지 않는 걸까요? 전 몇 주 전부터 ‘여기를 이제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인사팀에서는 빠르게 전환을 하고 싶어했고, 심지어 당일날 바로 기존 업무를 중단하고 본사로 넘어갈 수 있는 절차를 밟아도 되겠냐고 묻더군요. 그때가 오후 4시는 넘은 때라 서로 정리할 것도 있고 하니 다음 날 정리하기로 얘기는 했습니다만,
모니터를 끄고 잠시 멍하니 있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드디어 그만 두고 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인가? 더는 좋아하지도 않는 회사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을 기회인가? 최선을 다하고 얻는 것이라곤 몇 백의 월급 뿐인 삶을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가?’
사실 저는 생각보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어요. 한국에서 연봉으로 치면 8천은 되는 금액이더라고요. 물론 돈 잘버시는 분들이 워낙 많지만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지금 받는 연봉이 가장 높은 금액이거든요.
그런데 어쩌면 여기가 저의 임금 상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번역을 하면서 앞으로 제가 1억 이상의 연봉을 찍을 수 있을까요? 지난 번에 프리랜서의 임금 협상에 대해서 썼잖아요. 그 때 깨달은 건 제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었어요. 아마 저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가진 누군가는 더 낮은 임금으로도 일하려 할 수 있을 거에요. 저보다 열정이 더 많은 신입 분들도 있을거고, 수많은 에이전시들과 더불어 AI까지 저를 대체하려 들겠죠.
지금 당장 그만두면 회사로부터 받는 월급은 0원이 될 거에요. 하지만 조금 더 긴 시계열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1년 뒤, 2년 뒤 그리고 3년 뒤.. 제가 아마 동종 업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뭐, 적당히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지금과 비슷한 삶을 살겠죠? 연봉은 정확히 그 언저리일 거고 아마 회사는 한 두번 더 옮길 수도 있을 거 같네요. 확실한 건 재미는 없을 거고, 성장도 없을 거에요. 무엇보다도 지금과 같은 고민을 계속해서 하고 있을 거 같아요. 반대로 제 일을 한다면요? 한 달에 1백만 원도 못 벌 수도 있겠죠. 한 달에 1천만원 이상을 벌 수도 있고요. 하는만큼, 결국 해내는만큼 벌거나 못 벌 거에요.
제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허탈한 것은 수 개월 또는 수 년에 걸쳐 진행한 번역의 결과물에 아무런 지분을 갖지 못한다는 거에요.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에서 TOP10 게시물로 올리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로컬라이징을 했지만, 반영구적인 검색 순위에서 비롯되는 트래픽과 수익에 제 지분은 아무 것도 없거든요. 욕심일까요? 남의 일 해주면서 말이죠. 그런 욕심이 자꾸 든다면, 혼자서도 해낼 수 있을 거 같다면 제 일을 하는 게 더 맞겠죠?
지금까지는 돈 얘기만 했는데 사실 월급을 받는 삶을 그만두면서 파생되는 여러 삶의 양상들도 고려하고 있어요. 조금 더 주도적이 될 거고, 조금 더 도전적이게 되겠죠. 조금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할 거고,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할 거에요. 실패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려 하겠죠. 그렇게 시간과 노력과 경험과 성과가 쌓이면 언젠가는 좋은 동료들도 만날 수 있을 거에요.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한다.’ 듣기만 해도 좋네요.
일단 오후에 면접이 잡혀있는데 (본사로 다시 가는데 면접은 왜 보나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거 같아요) 우선은 어떤 일인지 이야기는 나눠보려고 해요. 그리고 역시나 예상한 대로라면 제 일을 해보려 합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의 서두에 적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말을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의심하면서 시험 삼아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나, 믿고 단호하게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나, 그 운명은 똑같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어차피 꺾게 되나요? 그렇다면 그냥 믿을게요. 아니, 최선을 다해 믿을게요. 아무런 의심없이, 단호하게.
전 해낼 수 있다고 믿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 자신이 아니라 제가 투자할 시간과 노력과 시도의 반복이 결국은 성과를 낼 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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