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어느 원룸에 살 무렵, 작업 공간이 필요했던 나는 매일 같이 스타벅스에 갔다. 그러다 연말이 되었고, 프로모션 스티커를 모아 내년의 다이어리(이제는 작년이 된)를 받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연말 선물로 받은 듯한 이 청록색 다이어리를 새로운 생각과 경험들로 빼곡히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니까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날 당시, 배낭의 맨 위에 넣어두었던 이 다이어리의 여백들이 설렘으로 가득한 여행의 순간들로 채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부푼 마음으로 낯선 땅에 도착한 어느 여행자는 이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결국 다이어리의 삼분의 일도 채우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계획대로라면 다이어리에는 인도를 시작으로 중앙아시아, 발칸 반도와 중동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지금쯤에는 동남아로 돌아와서 1년 간의 긴 여행을 정리하고 있을 터였다.
2021년 새해가 밝았고, 그렇게 이제는 철 지난 다이어리에는 채워지지 못한 여백들이 가득 남았다. 평소 같았으면 스마트폰을 보다 잠에 들 밤. 읽을 책을 골라보려 책장을 서성이다 책상 한 구석에 세워져 있는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그리고선 철 지난 다이어리에 지금의 이야기를 적기로 했다. 비록, 다이어리 위에 적혀있는 날짜는 훌쩍 지나가버렸지만, 이 다이어리에 채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1년, 그렇게 나는 철지난 2020년의 다이어리에 계속 이야기를 기록해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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