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드 V 페라리>를 봤다면 이를 보고 허무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걸 터무니없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타당하다. 왜냐하면 영화에는 도무지 허무주의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켄 마일스가 레이싱 경기 르망에서 최종적으로 1위가 아닌 2위를 차지할 때, 그리고 경기를 마치고 차를 몰다 폭발로 결국 사망했을 때 일종의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때 허무라 감각되는 감정은 켄의 삶과 선택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세계와 우리의 순수한 기대가 어긋남에 따라 겪게 되는 일종의 허탈감이라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허무와 레이싱의 세계
허무라는 건 속력은 있으나 무게나 방향이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영화에서 허무주의의 자리를 찾아 보기 어려운 이유는 레이싱의 세계에는 분명한 무게와 방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레이싱에는 부유하는 관념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오직, 시간과 거리라는 실재를 빠르게 돌파하는 일만이 존재한다. 동일한 레이싱 트랙을 돌고 또 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은 트랙에는 끝이 있으며,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각 트랙은 전체 트랙 속에서 방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쳇바퀴와 트랙
허무주의에 빠진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을 쳇바퀴에 묘사한다. 그저, 매일을 똑같이 되풀이하며 돌고, 또 돈다는 것이다. 쳇바퀴와 트랙의 차이점은 방향성에 있다. 쳇바퀴에는 거리와 속력만 있을 뿐 방향이 없다. 쳇바퀴는 공중에 떠 있는 일종의 부유 상태다. 땅을 딛고선 무게가 없기에 방향성이 존재할 수 없으며, 아무리 빠르게 멀리 달려가더라도, 결국 제자리다. 그렇게 쳇바퀴를 달려가는 이들은 삶을 회의하고, 허무주의에 빠져, 결국에 희망을 저버린다. 퍼펙트 랩은 쳇바퀴 속에서 반복되는 공허한 허무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트랙은 땅 위에 있다. 자신과 차체의 무게로 땅을 디딘다. 비록, 같은 트랙을 또 돌고 돌지만 그것은 끝이 있는 전체 속에서 방향성과 의미를 갖는다.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레이서는 무게 중심을 유지한 채,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차를 망가뜨리지 않고, 가능한 많은 퍼펙트 랩을 달성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트랙 위에 있는 모든 레이서는 최선을 다해 지금, 여기를 달려간다. 이제, 승리를 위한 퍼펙트 랩을 갈구하는 레이서들의 열정은 땀 냄새가 깃든 '이야기'가 되어 정점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 정점의 순간, 켄 마일스가 말하듯, 최선의 속력으로 달려가는 7,000 RPM 언저리에서, 레이서는 문득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마주한다. '너는 누구인가?' 뜬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전혀 뜬금없는 질문이 아니다. 이는 실재가 존재에게 던지는 일종의 방정식 같은 질문이다. <포드 V 페라리>에서 켄은 '나는 이 트랙 위를 달리는 레이서다.'라는 말 없는 대답을 내보인다.
저마다의 라스트 랩
우리 모두의 삶에는 라스트 랩이 존재한다. 언젠가는 한 번 더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라스트 랩의 피니시 라인을 지나며,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게 될까? 따라서 모든 퍼펙트 랩은 의미 있고 가치 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안타까워하게 될까? 따라서 퍼펙트 랩이 되지 못한 모든 랩은 의미있고 가치 있다. 모두가 주목하는 우승이 아닐지라도, 트랙 위를 자신만의 속도로 최선을 향해 달려갈 때, 허무주의를 위한 자리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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