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고 싶다면 이렇게 사세요'하고 말하는 책들을 읽을 때면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데 저자가 제시하는 말들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충돌할 때, 그것도 방대한 논리와 근거로 나를 설득해올 때, 어딘가 잘못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은 좀처럼 보지 않는다. 애초부터 우리는 다른 삶의 맥락에 놓여있고, 또한 행복에 대한 정의도 다른데 과연 그대의 말이 내게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까? 인생은 수학이 아니라 문학에 더 가까울 것이라 믿는 나는 행복과 삶에 대한 명쾌한 성공 방정식보다는 황량한 삶의 한복판에서 써내려간 누군가의 진실한 고백 앞에 멈춰서서 더 많이 다짐하고 결심하고 싶어진다.
사실 행복은 내 삶의 목표가 아니고, 때문에 나는 행복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의 불행한 일도 지나고 나면 좋았던 일이 될 수 있는 거고, 좋았던 일도 오히려 나쁜 기억이 될 수 있다. 극단적인 어떤 불행이 인생에 닥쳐오지만 않는다면, 그러니까 지극히 불행한 삶만 아니라면 그 자체로 행복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거 같다. 어쩌면 이것이 행복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문제는 누군가 겪는 불행과 또 그것이 야기되는 이유에 대한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부분이다. 이렇게 쓰고나면 항상 일종의 좌절감을 느끼며 한숨을 쉬게 된다. 모두가 일정 정도로 불행하지 않음을 보장받을 수는 없을까? 그저 허울뿐인 이야기 같을 수 있겠지만 진심으로 나를 포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지 않고,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은 뭘까? 개인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은 뭘까? 어디쯤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하는 걸까?
프랑스의 사진 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은 일상의 <결정적 순간>을 담은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런데 사실 이 결정적 순간이라 하는 것은 결정적이지 않은 순간들에 둘러 쌓여있다. 사진에 담길만한 결정적인 순간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는 결정적이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순간은 결정적이다. 행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곰곰이 따져보면 행복이라는 결정적인 순간 또한 행복하지 않은 다른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순간은 행복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이자, 행복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순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목표를 행복해지는 것에 둔다면 오히려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 중에서 나는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는 이 막막한 세상에 이유를 알 수 없이 던져졌다. 우리는 자꾸만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금 저 산 위로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행복은 지금 내가 딛고선 발 아래에 놓인다. 모든 행복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시작되고 또 소멸될 것이다. 매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데 불행하지 않냐고?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도 바로 지금-여기 뿐이다.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무수한 결정적인 순간의 가능성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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