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흑백 사진 ⏐ 56 ⏐ 일상 에세이

    흑백 사진을 좋아했다. 색상에 반응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피사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풍경이든. 흑백에 담긴 세계는 흥미로웠다. 그럴리 없었겠지만 세상이란 것을 조금 더 제대로 보는 느낌이었고,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듯 했다. 카메라를 하나 들고 발길 닿는 대로 걷기를 좋아했던 나는 남들이 다 아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힙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후미진 골목과 인기척 없는 뒷산에 오르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온 날에는 수 십 장의 고요한 흑백 사진이 메모리 카드에 가득 차 있었다. 흑백 사진을 찍으면서 알게 된 건 검정은 단순한 검정이 아니고, 하양은 단순한 하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운동의 시대는 여전히 유효한가 ⏐ 일상 에세이 ⏐ 37

    지난 한국 정치에 관한 글을 읽을 때면, 소위 말하는 '운동'이라는 용어를 자주 발견한다. 그러한 '운동권'에서 자란 적 없는 세대인 나는 주장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특정 계급의 행동 양식을 규범화하는 일종의 종교적 시대가 있었구나 하곤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살아가지만, 이와 공존하는 다른 이데올리기의 다양성과 실재성은 이전의 무엇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거칠게 말해, 전과 같은 '운동'은 당분간 유효하지 않을 것인데, 자본주의에서는 그러한 운동 또한 하나의 다양한 계급적 투쟁 정도로 치부되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러한 운동들은 다수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와 혁명을 위해서는 가진 것보다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이 다수가 되어 이를 정의로운 수..


    운명이란 해답 ⏐ 일상 에세이 ⏐ 19

    운명이란 것을 전혀 믿지 않지만, 때로는 운명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야 하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정체된 순간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을 움켜쥐지 않았기에 어쩌면 삶이란 게 멈춰버린 것이고, 그것을 움켜쥐어야만 삶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김영하는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고요. 소설가처럼 운명론에 철저하게 반대할 수 있는 이들도 없을 것이지만,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도, 그의 문장도 말입니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여행을 떠나며 ⏐ 일상 에세이 ⏐ 12

    1. 떠남은 영원할 것 같았던 익숙한 일상의 시간과 공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정신없이 달려가던 삶의 궤적 위에서 달음질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게 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애틋한 순간에 대한 아쉬움이 다가올 변화에 대한 기대로 대체되지 않는 순간에도 떠나가야 할 시간은 다가온다. 작은 매듭을 하나 만들어 둔다. 기약期約하는 것이다. 글을 남겨 둔다. 기억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기약하는 것은 기억하려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2. 떠남을 앞두고 릴케의 말을 곱씹어 본다. 당신은 아직 매우 젊고,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당신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주십시..


    집이라는 공간 ⏐ 일상 에세이 ⏐ 8

    크리스마스에 맞춰 짐을 부치고 집에 내려왔다. 2년이 넘는 길고도 짧았던 서울 살이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집은 포근하고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대학생이 되며 기숙사에 들어간 나는 20대가 되면서 집을 떠나왔고, 그때부터 내게 집은 든든한 밥을 먹고 애정을 누리는, 그렇게 지쳤을 때 쉼을 얻고, 다음을 위한 힘을 재충전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집에는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 가는 부모님이 줄곧 계셨다. 하우스(house)와 홈(home)이라는 영어 단어를 한국말로 번역하면 모두 집이지만, 그 둘의 뜻은 조금 다르다. 하우스가 건물로써 집을 의미한다면, 홈은 보다 아늑한 집 안의 공간, 가정을 일컫는다. 서울의 자취방이 그저 하우스에 불과했다면, 부모님과 함께 있는 이곳은 따뜻한 홈이다. 서울의 자취방..


    우리가 불안한 이유: 알랭 드 보통 <불안>을 읽고 (2)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변하지 않을 수 없다면 변화의 기준점이라도 스스로가 세워갈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 전에 그러한 기준점을 형성하는 사회 환경에 대해 먼저 고찰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함께 공유하는 또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면, '자유 의지'를 발휘해 이룩해 낸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일 것입니다. 능력주의는 많은 면에서 유용합니다. 능력이 있는 이들은 좋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능력에는 절대적인 부분과 동시에 상대적인 부분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국의 젊은 청년들은 절대적인 능력은 그 어느 세대보다 뛰어나지만, 동시에 같은 세대 내에서는 거의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