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일지] 14. 저번 달엔 무엇을 했을까? 6월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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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프리랜서 일지(完)
6월이 지났다. 벌써 7월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6월에 있었던 일들을 정산해 본다. 먼저,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처음 만났으니 나를 소개해야 했는데, 요즘에는 프리랜서라고 소개할지 그냥 번역가라고 소개할지 고민이 많았다. 사실 프리랜서라고 이야기하면 '힘들지 않아요?'라는 직간접적인 물음을 듣게 되는데 그게 싫었고, 번역가라고 하면 질문이 조금 더 디테일해지다가 결국 '프리랜서처럼 일하는'이라는 뉘앙스를 풍겨 또다시 이전의 질문을 듣기 일쑤였다. 사실 그게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한 보편적인 타인의 시선이긴 했지만, 난 정말 프리랜서로 사는 게 정말 좋고 그다지 힘들지도 않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그런 나의 대답들이 애써 '괜찮은 척'하려는 것처럼 비치는 거 같기도 했다. 그럴 땐 그냥 그러려니 ..
슬프고도 아름다운 ⏐ 일상 에세이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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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일상 에세이
가끔, 아니 자주 글자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갈하게 쓰이고 있는 글자들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닌, 그것들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단어와 이어 만들어 내려는 문장이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살아있는 문장들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시간의 순서를 흩뜨린다. 간밤. 새벽. 세시. 어떠한 이유에서 잠에서 깼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뒤척이다 프루스트 를 읽다가 한강 을 읽었다. 그들이 건네는 새로운 시간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엎드려 책을 보고 있는 방 안의 나를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데려갔다. 몇 년 전 나는 뉴질랜드의 깊은 산속, 한 헛(hut)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강물에 젖은 신발을 벽..
[프리랜서 일지] 13. 센티멘털함과 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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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프리랜서 일지(完)
6월의 셋 째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감사하기도 하며, 또 아쉽기도 하다. 어제 저녁에는 맥주를 한 잔 사러 편의점에 가면서 다소 헛헛한 감정이 들었다. 괜스레 한밤 중의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의지와 노력들이 작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1인극 같았다. 누군가는 이러한 센티멘털함과 현타가 동시에 밀려올 때면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좋아한다. 다시 한 번 방향을 점검하고 깊이를 다질 수 있는 내면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감정은 참 신기하다. 내 것인듯,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감정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와서는 한 잔 마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려 했으나 취기가 올라 일찍 잠에 들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쓰면서 당시를 떠올려 보건데, 글쎄. 그..
[프리랜서 일지] 12. 프리랜서와 계약직 노동자의 차이와 구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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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프리랜서 일지(完)
종종 내가 프리랜서인지 계약직 노동자인지 헷갈린다. 개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사안이지만,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단지 번역을 하고 있다고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이요?' 라고 묻게 되면, 한 회사에서 번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에서 일하는 번역가라는 이미지가 흔하지는 않은지 '아, 그럼 프리랜서세요?'라고 묻는 경우가 많다. 그럼 나는 '아, 네. 뭐 그런 셈이죠.'라고 대답을 한다. 프리랜서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없지만 이는 '일정한 집단 혹은 회사에 전속되지 않고 자유 계약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라 정의에 어느 정도 합의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 클라이언트와 1년, 혹은 그 이상으로 오래 일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러닝 ⏐ 일상 에세이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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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일상 에세이
요즘 집 앞의 불광천을 열심히 뛰고 있다. 응암역에서 출발하여 길고 곧게 뻗은 천을 따라 뛰다보면, 어느새 새절역을 지나 증산역에 다다른다. 부근의 다리 아래에서 한 템포 숨을 고르고 다시 뛰어 돌아오면 4킬로미터가 조금 못 되는 거리다. 그렇게 한밤 중의 러닝을 마치고 나면 숨이 차고 땀이 흠뻑 난다. 힘은 들지만 기분은 좋다. 러닝. 호흡을 하며 발을 길게 뻗어 나가는 행위는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한 발 한 발 그렇게 나아가는 일은 발 아래 빈 공간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도로는 하나의 트랙이 되고, 발디뎌 다시 돌아갈 공간이 된다. 의미는 행위에서 생겨나고,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자신에게 도착하고 있으므로. 러..
젠더 갈등이라는 것에 대한 짧은 생각 ⏐ 일상 에세이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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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일상 에세이
요즘 인터넷 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가 2030 남녀 간의 논박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박은 '젠더 갈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갈등은 실제로 문제가 있는 당사자들끼리의 다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젠더 '갈등'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세대 갈등', '지역 갈등'과 같이 지배 권력의 프레임 안에서 의도된 책임 전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박들이 젠더를 둘러싼 사회 구조를 간과하거나 너무 쉽게 긍정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상대를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행동은 결국 망가진 생태계는 보지 못한 채, '너 때문이야'라며, 눈 앞에서 함께 힘들어 하는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미성숙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특정 성별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성별이 더 ..
나에 대한 글쓰기,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이유 ⏐ 일상 에세이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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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일상 에세이
속도를 내기 전에 중요한 것은 달려가고 있는 방향을 점검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사회에서 글쓰기는 종종 뒤를 돌아보게 한다. 내 앞에 던져지는 '그래서 얼마나 빠르게 잘 해낼 것인가?' 하는 사회적 물음 앞에서 나에 대한 글쓰기는 '그것이 그러한 방식으로 내게 꼭 필요한 일인가?' 되묻게 한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나의 바깥을 둘러싼 물음들로부터 자신을 가다듬는 시도다. 나를 둘러 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수식어들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을 곁에 두기로 선택하는 일.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한 방향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해 두는 일. 지난 나의 행동을 돌아보며, 때로 칭찬하고 반성하는 일. 누가 나의 글을 보지 않더라도, 나에 대한 글쓰기 그 자체가 의미있..
몸과 정신의 균형 ⏐ 일상 에세이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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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일상 에세이
우리는 균형을 지향하는 존재다. 적절함, 이라는 상대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절대적인 기준점을 지향하는. 대학에 다니던 때, 나는 공부보다 여러 사상과 철학에 빠져 그것들을 골똘히 생각해보기를 좋아했다. 사상가와 철학가들은 저마다 하나의 삶을 관통하는 진리를 주장하곤 했다. 그것들이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렸다는 걸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가 앎이라는 정신적 활동에 몰입하는 동안 그토록 불행했던 적은 내 삶에 또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대인기피증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수많은 대학 동기들의 바깥에서 아싸가 되어 서성거리곤 했다. 전환점은 영국으로 떠난 워킹홀리데이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진정한 몸의 자유라는 것을 맛보았고, 동시에 정신의 자유 또한 몸과의 균형에서 비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