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의 만남
발리에서 J라는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같이 서핑을 배우며 친해졌다. 어느날 저녁, 한번은 맥주를 같이 마시며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인생은 파도와 같고 그러니 밀려오는 파도를 유유히 받아들이고 흘려보내야 할 줄 알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다 때로 파도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며칠만에 J라는 사람을 모두 알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J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과 진심을 다하려 했고 또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려는 사람 같았다. 그런 J의 모습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내가 저버린 가치들
20대 취준생 시절. 내 꿈은 사진 기자였다. 스물 여덟이 되며 나는 꿈을 포기했다. 모 언론사의 최종 면접 때였다. 왜 기자가 되고 싶냐는 너무도 쉽고도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 계속되는 취업 실패로 인해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때였고, 당시 정말 솔직한 내 심경은 잘 모르겠다였다. 수년 째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하여 이제는 기자가 될 수는 있을지, 과연 기자가 되고 싶기는 한 지 헷갈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나는 어느 면접 스터디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진실의 한 조각을 겸손히 찾아 전달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물론, 면접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로.
며칠 뒤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여섯 번째 탈락쯤 됐을까. 여기까지구나. 이제 그만하자.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것이 있고, 진심을 다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구나.
그날부로 나는 기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동시에 최선과 진심은 통한다는 힘없는 신념과 가치관도 함께 버렸다. 그간의 무능함을 이로 포장해왔던 지난 날을 조소하며.
누사페니다 여행
J가 요가 수련을 위해 우붓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함께 누사페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새벽 5시. 스미냑에서 그렙을 타고 사누르 항구로 갔다. 그곳에서 미리 예약해둔 페리를 타고 누사페니다 섬으로 갔다. 누사페니다는 꽤나 큰 섬이라 하루에 서부 또는 동부만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한적한 동부 투어를 하기로 했다.
누사페니다 항구에 도착하니 와츠앱으로 이야기를 나눈 현지 드라이버가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길은 좁고 험했다. 드라이버는 두 대의 차가 동시에 지나가려면 갓길에 바퀴를 올려야 하는 좁고도 굽이진 길 위로 거침없이 차를 몰았다. J와 나는 트리 하우스, 다이아몬드 비치, 아투 비치와 같은 아름다운 관광 포인트에 들러 사진을 찍었다.
J와 함께하는 순간은 꿈만 같았다. 서로를 향한 묘한 감정선이 나를 설레게 했고, 그때마다 바라본 J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J의 태도에는 배려와 존중이 베어 있었다. J가 내게 보여주는 최선과 진심 앞에서 나 또한 최선과 진심을 다해 생각과 마음, 행동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고 싶었다.
오후 2시. 느즈막한 점심 식사를 마지막으로 가이드가 준비했던 코스가 끝났다. 선착장으로 가야했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스미냑으로 돌아왔고, 며칠 뒤 J는 우붓으로 떠났다. 너무도 짧은 하루였다.
여행과 마음가짐
발리에 오기 전 나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여행을 하면 새로운 마음가짐이 때로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가짐은 하나의 태도이자 자세여서 그냥 두면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이것이다 싶은 마음가짐이 찾아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보듬어야 했다. 만약 이번에도 새로운 마음가짐이 찾아 온다면 그렇게 찾아온 소중한 삶의 태도를 조금 더 오래 유지해가고 싶었다. 그리고 새롭게 찾아온 마음가짐이 지난날 내가 저버린 것일 줄은 몰랐다.
그간 최선보다는 최선인 척 하려 했고, 진심을 다하기 보단 전략적으로 행동하려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윈윈하며 마찰없이 살아가는 어른스러운 방법이라 믿으며.
20대의 나는 몰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선과 진심은 통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럼에도 최선과 진심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선과 진심. 그것이야 말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이며, 평생에 걸쳐 보듬고 다듬어 가야 할 소중하고 진실한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정말 알지 못했다.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누군가를 이곳 발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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