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책 읽고 쓰기

    한병철 <피로 사회> : 너무 긍정적이어서 우울한 현대인을 위한 책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 의 첫 문장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질병은 무엇일까.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병균에 저항하듯 지배자의 명령과 규율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그렇게 자유와 의미를 추구했다. 그러나 현대는 신경성 질환을 앓는 시대다. 이 시스템에는 지배자가 없다. 해내지 못하면, 스스로 좌절감을 느낄 뿐이다. 이라는 복수형 긍정 문장은 이런 사회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에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들어섰다. 규율 사회의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만들어 냈다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21세기 사회는 규율 사회에 성과 사회가 되었다. 개인은 더이상 복종의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삶을 경영..


    신영복 <담론> : 존재에서 관계로

    한때, 의 뫼르소를 동경했다. 온전한 존재로 거듭난 그가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다는 카뮈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의 을 읽었다. 선생님은 감옥에 있으며 신문지 크기 만한 햇살 때문에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유일한 행복은 오로지 그 햇빛이었다며, 햇빛 때문에 아랍인들을 죽인 뫼르소를 언급했다. 선생님이 이야기 하는 중심에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란, 내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사회와 맺는 관계,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이되 고립되지 않고 관계들 속에 존재한다. 소설 속 뫼르소가 고독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극히 주체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절대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상대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 더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연애 그리고 밀당 많은 연애 지침서들은 진심을 숨기고, ‘밀당’ 게임에 열중하라 부추긴다. 한동안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존 그레이의 책 는 이러한 ‘경직된 사고’를 초래한 대표적인 경우였다. 마리 루티는 ‘사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남녀 관계나 연애에 관해 우리가 물려받은 경직된 사고’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남자와 여자 남녀가 현격히 다른 존재라는 주장은 대게 근거없는 생물학적 특성에서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아주 쉬운 예지만) 동성 간의 차이가 남녀 간의 차이보다 큰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도 성의 차이는 통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마리 루티는 ‘성별에 따른 지침이 우리 문화에 너무 만연해 있어서 누구도 이를 피해가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지적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여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또 읽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이 좋으면서도 또 감당하기 힘들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은 를 읽었고, 예상은 적중했다. 소설에 나오는 '나'가 준이 선배를 조금씩 좋아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 또 크게 상처 받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해 책을 덮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뒷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잠시 멈췄다가 계속 문장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 읽어버렸다. 좋은 걸까. 소설을 읽은 후에는 조금 더 머뭇거리게 되는 일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게 되는 일은. 한 여름,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일은 정말이지 안부가 궁금하거나 혹은 특정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준이 선배는 후자의 경우였다. 방송국에서 AD로 일하는 그는 한국의 달인, ..


    정이현 <서랍 속의 집> :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여

    한참을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다 꺼내든 건 꽤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꽂혀있던 이었다. 나는 문학상 소설집을 자주 사는데, 최신 수상집을 사기보다는 책을 사러 중고 책방에 갔다가 발견하는 것들을 집어 오곤 한다. 정확히 어떤 책을 사다가 함께 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책도 분명 다른 책을 사다가 함께 딸려온 것이었다. 김금희 을 포함해 앞에 몇 편은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났고, 수상집의 제일 뒷편에 실린, 엄밀히 따지자면 이번 수상작은 아니고 지난번에 수상한 작가들의 최근 단편이 실린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이현 작가의 을 읽었다. 서랍 속의 집 줄거리 소설에는 집을 찾아 다니는 부부가 나온다. 전셋집 계약이 만료되고, 아파트 시세가 오른 터라 전세금 인상이 통보된 상황에서 둘은 조금 무리를..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 작가가 빠지는 개인성의 함정

    "너무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김 여사의 내적 리듬을 따라 이어나가라는 말밖에 할 수 없네요. 그 내적인 리듬은 자기 스스로 느끼고 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 누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소설 창작의 철저한 개인성이 있는 것이죠. 그 개인성은 개성이라는 말로 바꿀수도 있죠.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는 13년 동안, 모든 창문과 문을 코르크로 막고 세상의 소음이 일체 들리지 않는 밀폐된 방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였지요. 그에게는 자기 작품에 대한 바깥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들이 한갓 소음으로 여겨졌을 뿐이지요. 그는 자기 창작 작업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으려는 듯한 자세로 철저히 개인성을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 바뀌어야 하는 건 형용이 아니라 명명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괴로운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중 헤르만 헤세의 에 이어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을 연이어 읽게 됐다. 따지고 보면 자..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 절망에서 벗어나는 실존의 용기

    죄는 이것이다. 즉, 신 앞에서 혹은 신에 대한 생각으로,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 혹은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강화된 연약함 혹은 강화된 반항이며, 죄는 절망의 강화다. - 키르케고르 p.158 1. 카페에 왔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큼지막한 창을 통해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실내의 온기에 두꺼운 외투를 벗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엇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옆 자리에서 한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헤드셋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까요. 나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습니다. 얼마전 구매한 키르케고르 이었습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많은 책들 중에서 왜 이책을 구매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