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일상 에세이
서른, 초조해 하지 말고 다음 물결을 기다리면 된다 ⏐ 일상 에세이 ⏐ 5
꽤나 울적하고 무기력했던 이십 대 시절이 있었다. 우울과 좌절 속에서 검은 밤 하늘 같은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몸과 마음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감당해 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보고, 사색을 하며, 글을 쓰며 보냈다. 한 때는 그렇게 지나간 이십대의 시간과 순간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의 점으로, 하나의 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른이 된 나는, 그렇게 서른 하나가 되어 가는 시점의 나는 더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들이 조각 나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각으로 고스란히 내게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
트랙에는 허무주의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 일상 에세이 ⏐ 4
영화 를 봤다면 이를 보고 허무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걸 터무니없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타당하다. 왜냐하면 영화에는 도무지 허무주의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켄 마일스가 레이싱 경기 르망에서 최종적으로 1위가 아닌 2위를 차지할 때, 그리고 경기를 마치고 차를 몰다 폭발로 결국 사망했을 때 일종의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때 허무라 감각되는 감정은 켄의 삶과 선택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세계와 우리의 순수한 기대가 어긋남에 따라 겪게 되는 일종의 허탈감이라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허무와 레이싱의 세계 허무라는 건 속력은 있으나 무게나 방향이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영화에서 허무주의의 자리를 찾아 보기 어려운 이유는 레이싱의 세계에는 ..
내가 수영을 배우는 이유 ⏐ 일상 에세이 ⏐ 2
잠시 동안 이었지만 초등학생 때 내 꿈은 축구 선수였다. 친구들은 꿈나라에 빠져있을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곳에서 슛돌이 꿈나무들과 공을 찼다. 폐활량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민첩성은 좋은 편이라 공격수로 주로 뛰곤 했다. 물론 중학교에 들어가며 그 꿈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가 재밌었고,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매일 공을 차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축구뿐만 아니라 운동 자체를 거의 하지는 못했는데, 학교에서 운동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육 시간은 일주일에 딱 2시간이 주어졌었는데, 그것마저도 고3이 되니 쓸데없는 예체능이라 하여 없어져버렸다. 대학생이 되고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축구도 하고 풋살도 하며 다시 운동에 흥미를 붙여갈 무렵, 새로운 운..
책이 읽고 싶을 때 ⏐일상 에세이 ⏐ 1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난 다음 공백의 시간이 찾아들때면, 책을 읽고 싶다. 오늘처럼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아침이면 독서만큼 좋은 게 없다. 물론 독서만큼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두 뺨에 와닿는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팔락거리는 책장을 바람결이 넘기도록 내버려두며, 풍경과 텍스트를 번갈아 응시하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책을 읽을 때면 몸과 마음의 빈 공간이 말과 문장으로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면 얼마 뒤 새로운 문이 하나 열린다. 그러니까 여러 책 중에서도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외연과 내연은 한껏 부풀었다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새로운 문을 내곤 한다. 그렇게 책을 읽음으로써 성장해 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읽어내지 않으면 결코 살아있지 못하는..
비오던 날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비오던 날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바다가 보고 싶어 인천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바다를 보러 가려면 어디에 가야 할까 싶어 찾아보다가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인천에 다녀왔는데, 문제는 생각보다 멀다는 것, 그리고 가는 동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이내 비상등을 켜고 달리지 않으면 안될만큼 폭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것. 서울을 빠져나가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지났다. 통행료로 6천원을 내고서 도착한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보게 된 바다는 잿빛이었다. 잿빛 바다를 보고있자니 처음엔 뭔가 싶다가, 그래 바다는 본래 푸른 것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근처에 있는 동해막국수에서 먹었다. 아마도 비빔 막국수에 명태를 갈아 넣은 것 같았는데, 먹을만 하면서도 식감이 좀 텁텁해서 금방 물리는 ..
석모도 여행, 함께 바다를 보다 ⏐ 여행 에세이
석모도 여행, 함께 바다를 보다⏐ 여행 에세이 이번 여행도 그와 떠났다. 우린 오래된 여행 친구다. 대학생 때 만났으니 햇수로는 벌써 8년 째다. 그는 나보다 3살이 어리지만 나는 그를 동생이라 생각한 적이 많지 않다. 그는 여전히 존댓말을 쓰지만, 그리고 그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다시 알게 되었지만,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항상. 첫 여행이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경주였던 거 같다. 대학생 때는 도보 여행도 하고 자전거 여행도 하고 했는데 요새는 차를 타고 여행하는 일이 많아진 거 같다. 서울에서 바다를 보러 단숨에 달려갈 수 있으니 (물론 네비를 잘 못 봐서 자주 헤매지만) 좋기도 하지만, 어딘가 아쉽기도 하다. 석모도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