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인상 깊은 문단과 짧은 생각들
·
책/책 읽고 쓰기
1 개인의 자유, 하면 흔히 책임을 떠올리지만 이는 시스템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방식 일 뿐, 실은 자유와 가장 가까운 단어는 불안이다. 그런데 왜 자유하면, 자꾸만 책임을 이야기 할까. 그건, 이 시대가 성과지향 시대이기 때문이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여겨지는 시스템은 권력을 따라 그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이는 한편으로 자유로웠다 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을 자책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자유로운 뜻을 따라 무언가를 자유롭게 택했을 때, 성과를 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와 같은 말은 보통 실패했다면?이 된다) 하는 압박과 함께 책임이란 단어가 슬며시 등장하는 것이다. 자유를 이야기 할 때 책임은,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기 보다는 자유의 결과를..
한병철 <시간의 향기>를 읽고 ∙ 향기는 이야기에 깃든다
·
책/책 읽고 쓰기
현대인의 밤은 공허하고, 불안하다. 단 한 번의 삶,이라는 유한성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대체된 오늘날, 현대인들은 속도를 높여 달린다. 가속도가 붙은 삶은 무수한 쾌락을 선사하지만 쾌락은 금세 증발한다. 그렇기에 또 다른 쾌락을 위해서는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끝은 없고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이다. 가능성을 마주하고, 도전하는 삶은 어떠한 방향성과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추앙받는다. 영원히 마무리 되지 않는 가능성, 우주처럼 무한한 그 공백과 허무 속에서 그렇기에 매일의 밤은 초조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병철은 바우만을 통해 말한다. '더 이상 현대에는 산책자도 방랑자도 없다'고. 유유자적함이나 경쾌함이 사라진 곳에는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이 잡는다고. 오늘날의 '시간은 원자화되고, 평면..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 말에 관한 이야기
·
책/책 읽고 쓰기
소설 에 나오는 '나'는 어느 부잣집에서 자란 것 같은 인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대책없이 살아가는 '나'는 막무가내인 성격이어서, 뭐든 내키는대로 마음을 따라서 행동한다. 그는 어딘가 사회에 부적응하는 자 같지만,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회가 나와 다를 뿐이다. 가령, 그는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 기요에게 편지를 쓰는데, 이런식이다. '어제 도착했다. 별볼일 없는 동네다. 다다미 열다섯 장이 깔린 방에 누워 있다. 여관집 종업원에게 덧돈으로 5엔을 주었다. 오늘 주인 마누라가 책상에 이마가 닿도록 절을 했다. 어제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기요가 에치고의 갈엿을 껍질까지 먹는 꿈을 꾸었다. 내년 여름에는 돌아갈 것이다. 오늘 학교에 가서 선생들에게 별명을 붙여주었다. 교장은 너..
한병철 <피로 사회> : 너무 긍정적이어서 우울한 현대인을 위한 책
·
책/책 읽고 쓰기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 의 첫 문장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질병은 무엇일까.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병균에 저항하듯 지배자의 명령과 규율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그렇게 자유와 의미를 추구했다. 그러나 현대는 신경성 질환을 앓는 시대다. 이 시스템에는 지배자가 없다. 해내지 못하면, 스스로 좌절감을 느낄 뿐이다. 이라는 복수형 긍정 문장은 이런 사회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에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들어섰다. 규율 사회의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만들어 냈다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21세기 사회는 규율 사회에 성과 사회가 되었다. 개인은 더이상 복종의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삶을 경영..
신영복 <담론> : 존재에서 관계로
·
책/책 읽고 쓰기
한때, 의 뫼르소를 동경했다. 온전한 존재로 거듭난 그가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다는 카뮈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의 을 읽었다. 선생님은 감옥에 있으며 신문지 크기 만한 햇살 때문에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유일한 행복은 오로지 그 햇빛이었다며, 햇빛 때문에 아랍인들을 죽인 뫼르소를 언급했다. 선생님이 이야기 하는 중심에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란, 내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사회와 맺는 관계,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이되 고립되지 않고 관계들 속에 존재한다. 소설 속 뫼르소가 고독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극히 주체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절대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상대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 더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
책/책 읽고 쓰기
연애 그리고 밀당 많은 연애 지침서들은 진심을 숨기고, ‘밀당’ 게임에 열중하라 부추긴다. 한동안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존 그레이의 책 는 이러한 ‘경직된 사고’를 초래한 대표적인 경우였다. 마리 루티는 ‘사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남녀 관계나 연애에 관해 우리가 물려받은 경직된 사고’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남자와 여자 남녀가 현격히 다른 존재라는 주장은 대게 근거없는 생물학적 특성에서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아주 쉬운 예지만) 동성 간의 차이가 남녀 간의 차이보다 큰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도 성의 차이는 통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마리 루티는 ‘성별에 따른 지침이 우리 문화에 너무 만연해 있어서 누구도 이를 피해가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지적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여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
책/책 읽고 쓰기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또 읽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이 좋으면서도 또 감당하기 힘들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은 를 읽었고, 예상은 적중했다. 소설에 나오는 '나'가 준이 선배를 조금씩 좋아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 또 크게 상처 받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해 책을 덮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뒷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잠시 멈췄다가 계속 문장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 읽어버렸다. 좋은 걸까. 소설을 읽은 후에는 조금 더 머뭇거리게 되는 일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게 되는 일은. 한 여름,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일은 정말이지 안부가 궁금하거나 혹은 특정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준이 선배는 후자의 경우였다. 방송국에서 AD로 일하는 그는 한국의 달인, ..
정이현 <서랍 속의 집> :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여
·
책/책 읽고 쓰기
한참을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다 꺼내든 건 꽤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꽂혀있던 이었다. 나는 문학상 소설집을 자주 사는데, 최신 수상집을 사기보다는 책을 사러 중고 책방에 갔다가 발견하는 것들을 집어 오곤 한다. 정확히 어떤 책을 사다가 함께 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책도 분명 다른 책을 사다가 함께 딸려온 것이었다. 김금희 을 포함해 앞에 몇 편은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났고, 수상집의 제일 뒷편에 실린, 엄밀히 따지자면 이번 수상작은 아니고 지난번에 수상한 작가들의 최근 단편이 실린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이현 작가의 을 읽었다. 서랍 속의 집 줄거리 소설에는 집을 찾아 다니는 부부가 나온다. 전셋집 계약이 만료되고, 아파트 시세가 오른 터라 전세금 인상이 통보된 상황에서 둘은 조금 무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