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마음을 돌아보는 밤 ⏐ 일상 에세이 ⏐ 45
1. 오랜만에 혼자서 요가를 했다. 전에 정말 친절하게 요가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자세들을 조금씩 떠올리며, 뻐근한 몸을 어찌해보려 애썼다. 요가를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작은 스탠드 불빛 하나와 매트 하나만 있으면 됐다. 한밤의 요가를 마치고 나니 문득, 집 안의 물건들 대부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2. 매일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급했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깊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요가는 글쓰기와 닮았다. 늦은 밤, 작은 종이 위에 연필 하나를 쥐고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3. 나조차도 믿기지 않지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했던 시절이 있었다. 형식적인 경건을 표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삶의 태..
요즘의 나 ⏐ 일상 에세이 ⏐ 44
1. 올해를 시작할 때쯤에야 분주하게 거처를 옮겼고, 새로운 환경에서 상당히 많은 인풋들이 있었다. 부트캠프에서 백엔드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한 나는 열심히 파이썬과 장고를 공부하고 있다. 정말이지, 하루 12시간이 넘게 모든 걸 갈아 넣고 있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터미널을 통해 들어오는 리퀘스트에 제대로 반응하는 코드들을 보며 초심자의 만족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2. 작년 한 해는 존버의 해였다. 그 누구에게도 모든 것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던 만큼, 숨 가빴고, 힘겹기도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아웃풋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믿게 되었다. 파편 같이 삶의 흩어진 모든 점들이 언젠가는 모두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
농부의 마음으로 ⏐ 일상 에세이 ⏐ 43
농부의 마음으로 씨앗을 뿌리자. 잘 자랄지, 정말로 잘 자랄지 걱정하지 말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자. 매일 같이 나가 새싹을 돌보고, 날씨가 좋기를 기도하자. 운이 좋다면 원하는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또다시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자. 농부의 마음으로 씨앗을 뿌리자. 다시, 또 다시…
슬프고도 아름다운 ⏐ 일상 에세이 ⏐ 42
가끔, 아니 자주 글자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갈하게 쓰이고 있는 글자들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닌, 그것들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단어와 이어 만들어 내려는 문장이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살아있는 문장들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시간의 순서를 흩뜨린다. 간밤. 새벽. 세시. 어떠한 이유에서 잠에서 깼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뒤척이다 프루스트 를 읽다가 한강 을 읽었다. 그들이 건네는 새로운 시간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엎드려 책을 보고 있는 방 안의 나를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데려갔다. 몇 년 전 나는 뉴질랜드의 깊은 산속, 한 헛(hut)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강물에 젖은 신발을 벽..
러닝 ⏐ 일상 에세이 ⏐ 41
요즘 집 앞의 불광천을 열심히 뛰고 있다. 응암역에서 출발하여 길고 곧게 뻗은 천을 따라 뛰다보면, 어느새 새절역을 지나 증산역에 다다른다. 부근의 다리 아래에서 한 템포 숨을 고르고 다시 뛰어 돌아오면 4킬로미터가 조금 못 되는 거리다. 그렇게 한밤 중의 러닝을 마치고 나면 숨이 차고 땀이 흠뻑 난다. 힘은 들지만 기분은 좋다. 러닝. 호흡을 하며 발을 길게 뻗어 나가는 행위는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한 발 한 발 그렇게 나아가는 일은 발 아래 빈 공간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도로는 하나의 트랙이 되고, 발디뎌 다시 돌아갈 공간이 된다. 의미는 행위에서 생겨나고,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자신에게 도착하고 있으므로. 러..
나에 대한 글쓰기,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이유 ⏐ 일상 에세이 ⏐ 39
속도를 내기 전에 중요한 것은 달려가고 있는 방향을 점검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사회에서 글쓰기는 종종 뒤를 돌아보게 한다. 내 앞에 던져지는 '그래서 얼마나 빠르게 잘 해낼 것인가?' 하는 사회적 물음 앞에서 나에 대한 글쓰기는 '그것이 그러한 방식으로 내게 꼭 필요한 일인가?' 되묻게 한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나의 바깥을 둘러싼 물음들로부터 자신을 가다듬는 시도다. 나를 둘러 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수식어들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을 곁에 두기로 선택하는 일.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한 방향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해 두는 일. 지난 나의 행동을 돌아보며, 때로 칭찬하고 반성하는 일. 누가 나의 글을 보지 않더라도, 나에 대한 글쓰기 그 자체가 의미있..
몸과 정신의 균형 ⏐ 일상 에세이 ⏐ 38
우리는 균형을 지향하는 존재다. 적절함, 이라는 상대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절대적인 기준점을 지향하는. 대학에 다니던 때, 나는 공부보다 여러 사상과 철학에 빠져 그것들을 골똘히 생각해보기를 좋아했다. 사상가와 철학가들은 저마다 하나의 삶을 관통하는 진리를 주장하곤 했다. 그것들이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렸다는 걸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가 앎이라는 정신적 활동에 몰입하는 동안 그토록 불행했던 적은 내 삶에 또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대인기피증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수많은 대학 동기들의 바깥에서 아싸가 되어 서성거리곤 했다. 전환점은 영국으로 떠난 워킹홀리데이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진정한 몸의 자유라는 것을 맛보았고, 동시에 정신의 자유 또한 몸과의 균형에서 비롯..
스마트폰 중독과 과다한 인풋 ⏐ 일상 에세이 ⏐ 36
프로젝트 100에 참여하고 있는 요즘, 필사를 하면서 베껴쓰고 있는 문장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 머릿 속에 부유하는 잡념들 때문인데, 그 대부분이 어제 본 쓸모없는 뉴스들, 오늘 본 자극적인 콘텐츠들의 잔상이다. 쓴 일본의 사상가이자 작가 사사키 아타루는 '정보는 명령'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수 많은 정보들이 시간과 생각을 통제한다. 스마트폰은 하루에도 수십개씩 알람을 보내고,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피드를 반복하여 새로고침하게 만든다. 과다한 인풋, 생각의 사로잡힘, 가시지 않는 피로. 그리하여 우리는 오래된 브라우저처럼 온갖 웹사이트의 캐시들을 온 몸에 가득 채운채 무거운 몸과 혼탁한 정신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과다한 인풋을 통제하고, 꽉 찬 휴지통을 ..